멍이 잘 드는데 피 검사는 정상이라면
〈검사는 정상인데 왜 아플까〉 · 17편 중 13번째
짧은 답
부딪힌 기억도 없는데 팔뚝에 멍이 듭니다. 피 검사는 정상이라 더 답답하십니다. 저는 이럴 때 피가 아니라, 혈관을 받쳐 주던 둘레를 봅니다.
목차
"어디 부딪힌 기억도 없는데 팔에 멍이 들어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은 대개 걱정을 안고 오십니다. 피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큰 병의 신호는 아닌지. 그래서 피 검사를 받아 보셨는데 정상이라는 말을 들으셨습니다. 그러면 답답함이 더 커집니다. 멍은 계속 드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니.
이 흔한 일이 왜 생기는지 하나씩 보겠습니다.
멍이 드는 자리가 정해져 있습니다
먼저 어디에 생기는지부터 보겠습니다.
우리나라 어르신 193명을 살펴본 연구가 있습니다. 멍이 있거나 있었던 분이 57명이었는데, 그중 팔뚝과 손등이 96.5% 였습니다. 종아리와 발이 그다음이고, 허벅지가 뒤를 이었습니다. 시작되는 나이는 평균 71세 무렵이었습니다.
아무 데나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피부가 얇고, 그 아래에 받쳐 줄 것이 적은 자리에 생깁니다.
터진 것은 혈관인데, 헐거워진 것은 그 둘레입니다
여기가 오늘의 요점입니다.
피부 속 가는 혈관은 혼자 있지 않습니다. 진피라는 층에 콜라겐과 엘라스틴이 그물처럼 짜여 있고, 혈관은 그 그물 안에 안겨 있습니다. 몸 깊은 곳의 정맥은 단단한 근막이 싸고 있습니다. 그런데 피부 근처 모세혈관은 이 성긴 그물에만 기댑니다.
나이가 들며 이 그물이 얇아지고 성겨집니다. 그러면 두 가지가 함께 일어납니다. 작은 힘에도 혈관이 터지고, 터진 피가 번지는 것을 막아 줄 것이 없어 넓게 퍼집니다. 같은 힘으로 부딪혀도 젊을 때는 표가 안 나던 것이 이제는 손바닥만 하게 남는 이유입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텐트의 뼈대가 부러진 것이 아니라, 천이 늘어난 것입니다.
혈관 안쪽 면에서 벌어지는 일은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혈관 안쪽 면은 흐름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검사는 정상으로 나옵니다
응고 기능이나 혈소판 수는 이 일과 직접 관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대개 정상으로 나옵니다.
교과서도 그렇게 적습니다. 이런 멍에서 응고 검사와 혈구 검사는 보통 정상이고, 다른 이상한 출혈이 함께 있을 때만 검사를 넓힌다고 적혀 있습니다.
검사가 정상이라는 말은 "아무 일도 없다"가 아니라 "피 쪽에는 문제가 없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피가 아니라, 그 피를 담고 있던 자리에 있었습니다.
멍 색이 바뀌는 동안 몸이 하는 일
"한 달이 다 되도록 안 없어져요." 이 말씀도 자주 듣습니다.
멍이 검붉었다가 푸르스름해지고, 그다음 초록빛이 돌다가 노랗게 바래는 것을 보셨을 겁니다. 색이 도는 순서가 있는 것은, 몸이 새어 나온 피를 정해진 순서로 치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혈관 밖으로 나온 적혈구가 깨지면 그 안의 붉은 색소가 남습니다. 청소를 맡은 세포가 이를 분해하면서 먼저 초록빛 물질이 되고, 다음에 노란 물질이 됩니다. 노랗게 보이는 그 물질이 빌리루빈입니다. 황달에서 흰자위를 노랗게 물들이는 그 물질입니다. (진료실에서 눈을 보는 이유)
즉 멍이 색을 바꾸면 나빠지는 중이 아니라 치워지는 중입니다. 다만 그 청소는 혈류와 림프가 실어 날라야 끝납니다. 그래서 순환이 더딘 자리에서는 같은 멍도 더디게 빠집니다. 정강이의 멍이 팔뚝의 멍보다 오래 남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볕 때문이라는 말, 그런데
이런 멍은 흔히 햇볕에 오래 노출된 탓으로 설명됩니다. 자외선이 진피의 그물을 삭게 만든다고 여러 자료가 말합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우리나라 연구에서는 볕을 쬔 정도와 멍 사이에 뚜렷한 관련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신 네 가지가 걸렸습니다. 이상지질혈증, 항응고제(피를 묽게 하는 약), 피부 질환을 앓은 적, 그리고 운동 부족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흥미롭게 봅니다. 넷 중 셋이 피부 바깥의 일입니다. 피부의 그물이 얼마나 튼튼한가는 피부만의 사정으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멍이 아니라 그물이 얇아진 조건을 봅니다
이런 분께는 멍 자체를 없애는 방법을 먼저 찾지 않습니다. 그물이 얇아진 조건을 봅니다.
콜라겐은 한번 짜 두면 그대로 남지 않습니다. 계속 조금씩 헐리고 다시 지어집니다. 허무는 일은 정해진 효소들이 맡고, 그 효소를 억제하는 단백질이 함께 있어 균형을 잡습니다. 얼마나 튼튼한 그물이 남느냐는 이 둘의 비율로 정해집니다. 오래된 염증과 자외선은 허무는 쪽을 키웁니다.
스테로이드는 콜라겐을 만드는 세포의 증식을 억제합니다. 그래서 오래 바르면 진피가 얇아지고, 실혈관이 비치거나 이런 멍으로 나타납니다. 연고를 몇 년째 쓰고 계신 분이라면 한 번쯤 짚어 볼 자리입니다. 필요해서 쓰는 약이니 스스로 끊으실 일은 아니고, 처방하신 곳과 상의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저는 드시는 약에 항응고제가 있는지, 오래 쓰신 연고가 있는지, 혈당과 지질이 어떤지, 몸을 얼마나 쓰고 계신지를 함께 묻습니다. 앞의 연구에서 운동 부족이 걸린 대목도 저는 이 결로 읽습니다. 쓰지 않는 조직은 다시 짓는 일도 게을러집니다.
한약도 이 자리에서 혈관을 단단하게 만드는 약으로 쓰지 않습니다. 진피의 그물을 다시 짜는 일은 결국 몸이 합니다. 저는 그 일이 더디어질 만한 것들을 봅니다. 가라앉지 않은 염증이 남아 있는지, 그 부위에 피가 도는지, 단백질이 실제로 흡수되고 있는지.
다만 몇 십 년에 걸쳐 얇아진 조직이 몇 주에 두꺼워지지는 않습니다. 이 일은 그런 속도로 가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검사를 먼저
멍이 갑자기 부쩍 늘거나, 코피·잇몸 출혈이 함께 오거나, 다리에 좁쌀 같은 붉은 점이 함께 돋는다면 그때는 피 쪽을 확인해야 합니다. 피를 묽게 하는 약을 드시는 중에 멍이 급격히 늘어난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딪히지도 않았는데 드는 멍은, 피가 묽어져서가 아니라 피를 감싸고 있던 것이 얇아져서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검사가 정상이라는 말을 듣고 돌아서셨다면, 그 말은 절반만 맞습니다. 피는 정상입니다. 다만 그 피가 지나는 자리가 예전 같지 않습니다.
참고한 자료
- 나이와 함께 진피가 얇아지고 혈관을 받치는 힘이 줄면 작은 힘에도 실혈관이 터진다 — 응고·혈소판 검사는 대개 정상이다 — StatPearls
- 우리나라 어르신 193명 조사 — 팔뚝·손등이 96.5%, 이상지질혈증·항응고제·피부질환력·운동 부족이 관련 인자로 나왔고 볕과는 뚜렷한 관련이 없었다 — Annals of Dermatology, 2021
- 스테로이드는 콜라겐을 만드는 세포의 증식을 억제해 진피를 얇게 만들고, 그 결과가 실혈관 확장이나 자반으로 나타난다 — Clinical, Cosmetic and Investigational Dermatology, 2020
글: 허지영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학 병리학 박사 · 前 경희대 본초학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