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관 안쪽 면은 흐름을 느끼고 있습니다
짧은 답
혈관 안쪽에는 흐름을 감지하는 얇은 층이 덮여 있습니다. 피가 고르게 흐르면 이 층이 그 힘을 읽어 혈관을 열어 두고, 흐름이 약해지면 같은 층이 성질을 바꿉니다. 길이 넓으냐만큼 이 면이 성해 있느냐가 일을 합니다.
"검사에서는 혈관이 깨끗하다는데, 순환이 안 되는 느낌이에요."
진료실에서 자주 듣습니다.
먼저, 혈관이 깨끗하다는 것은 좋은 소식입니다. 그 검사는 굵은 혈관이 좁아지거나 막히지 않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고, 거기서 이상이 없다면 큰 걱정 하나가 줄어듭니다.
다만 그 검사가 답하는 질문과, 몸이 무겁게 느껴지는 자리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실제로 느끼는 것은 굵은 길보다 훨씬 가는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 가는 자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겠습니다.
혈관은 속이 빈 관이 아닙니다
혈관 안쪽에는 세포가 한 겹 깔려 있습니다. 내피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층이 하나 더 있습니다. 당과 단백질이 엮여 솜털처럼 서 있는 층인데, 글리코칼릭스라고 부릅니다.
피가 흐를 때 혈관 벽에 직접 닿는 것은 벽이 아니라 이 솜털층입니다.
이 층이 흐름을 느낍니다
이 층이 하는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흐름을 감지하는 센서로 일합니다.
피가 고르게 흐르면 그 힘이 솜털을 눕히고, 눕는 힘이 세포 안쪽 골격까지 전달됩니다. 그러면 내피가 일산화질소를 내놓습니다. 이 물질이 혈관 근육을 풀어 길을 넓히고, 동시에 피가 잘 엉기지 않는 상태를 유지합니다.
솜털층에서 헤파란 황산·히알루론산·시알산을 없애 보면, 흐름을 줘도 일산화질소가 나오지 않습니다. 흐름은 그대로인데 느끼는 쪽이 없으면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순환은 피가 지나가느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나가는 것을 느끼고 응답하는 면이 성해 있느냐가 나란히 있습니다.
흐름이 약해지면 그 면의 성질이 바뀝니다
이 관계는 양쪽으로 갑니다.
흐름이 오래 약해지면 내피는 다른 상태로 넘어갑니다. 잘 열어 두고 잘 미끄러지게 하던 쪽에서, 잘 달라붙고 잘 엉기는 쪽으로. 길이 좁아지면 덜 흐르고, 덜 흐르는 상태는 다시 면을 바꿉니다. 어느 쪽이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끌고 갑니다.
오래 앉아 계시다가 일어서면 다리가 한결 가벼워지는 것도 이 층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자세가 바뀌어 흐름이 돌아오면 조직이 부풀리던 신호가 빠르게 줄어듭니다.
밖으로 새는 것도 여기서 갈립니다
오래 배운 설명은 이랬습니다. 모세혈관 앞쪽에서 물이 조직으로 빠져나갔다가 뒤쪽에서 다시 빨려 들어온다.
지금은 다르게 봅니다. 대부분의 조직에서 그 되빨림은 오래 유지되지 않습니다. 안과 밖을 가르는 실제 막은 혈관 벽이라기보다 그 솜털층이고, 조직으로 나간 물은 주로 림프를 통해 돌아옵니다. (오후에 다리가 붓는 이야기는 따로 적어 두었습니다.)
그래서 이 층이 깎이면 새는 쪽으로 기웁니다. 염증에 깎이고, 혈당이 높을 때 깎이고, 산화 스트레스에 깎이고, 피가 멎었다가 다시 흐를 때도 깎입니다. 깎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활성산소, 그리고 이 층을 잘라 내는 헤파라나제와 기질금속단백분해효소 같은 것들입니다.
흐름을 느끼는 층에 손을 댑니다
이 층을 알고 나면 손볼 자리가 하나 더 생깁니다. 저는 순환 이야기를 들을 때 굵기와 함께 이 면의 형편을 같이 생각합니다.
먼저 이 면 자체를 지키는 쪽이 있습니다. 황련이 그렇습니다. 내독소로 염증을 일으킨 쥐와 사람 혈관내피세포에서, 황련의 성분이 이 솜털층의 두 축인 신데칸-1과 헤파란 황산이 벗겨지는 것을 줄였습니다. 앞서 말한 활성산소·헤파라나제·기질금속단백분해효소도 함께 낮아졌습니다. 깎는 쪽을 줄이니 층이 남았습니다.
들어오는 쪽을 여는 약재는 따로 있습니다. 계지가 그렇습니다. 말초의 가는 동맥을 열어 혈류를 밀어 넣는데, 같은 약재가 이 솜털층이 깎여 나가는 것을 막는 쪽으로도 일합니다. 한 재료가 서로 다른 층에서 각각 일합니다.
돌아 나오는 쪽을 돕는 약재도 있습니다. 황기는 정맥과 림프가 걷어 가는 힘을 올리는 쪽입니다. 미는 힘과 걷어 가는 힘이 함께 있어야 흐름이 한 방향으로 돕니다. 밀기만 하면 조직에 고이고, 걷어 가기만 하면 밀어 넣을 것이 없습니다.
다만 여기서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모자라 보인다고 공급만 늘리는 것이 답은 아닙니다. 받을 준비가 안 된 조직에 갑자기 밀어 넣으면 회복이 아니라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채워 넣는다고 살아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실제 몸에서는 이 갈래들이 따로 놀지 않습니다. 들어오는 쪽이 약한 자리는 대개 돌아 나오는 쪽도 함께 느려져 있고, 면이 상한 자리는 양쪽이 다 어렵습니다. 그래서 한 곳만 손봐서는 잘 안 됩니다. (차갑고 둔한 통증과 뜨겁고 부은 통증)
혈관을 굵기만으로 보면 놓치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 안쪽에는 흐름을 느끼고 응답하는 얇은 층이 덮여 있고, 이 층은 흐름에 따라 성질이 달라집니다. 흐르니까 성해지고, 성하니까 흐릅니다.
한약이 이 자리에서 하는 일은 없던 흐름을 만들어 내는 쪽이라기보다, 몸이 원래 하던 응답이 다시 일어날 조건을 만드는 쪽에 가깝습니다. 미는 손과 걷어 가는 손이 각각 다른 자리에 놓이고, 놓이는 때도 조금씩 다릅니다.
물론 순환이 몸의 전부는 아닙니다. 화학도 대사도 면역도 나란히 있고, 순환은 그중 하나입니다. 다만 이 하나를 들여다볼 때, 길이 뚫렸는지만 보지 않고 그 안쪽 면까지 함께 보면 설명되는 것이 늘어납니다.
한쪽 다리만 갑자기 붓거나, 붓기에 열감과 통증이 함께 오거나, 숨이 차다면 — 이건 다른 문제입니다. 진료를 먼저 받으셔야 합니다.
참고한 자료
- 글리코칼릭스가 흐름을 감지해 일산화질소 생성을 매개한다 — Biochemical and Biophysical Research Communications, 2007
- 조직액 균형에 대한 재검토 — 되빨림보다 림프 — The Journal of Physiology, 2004
- 베르베린이 글리코칼릭스 분해를 줄이고 회복을 돕는다 — International Immunopharmacology, 2018
글: 허지영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학 병리학 박사 · 前 경희대 본초학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