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불이 아니라 잔불입니다
〈검사는 정상인데 왜 아플까〉 · 17편 중 14번째
짧은 답
염증에는 크게 타오르는 큰 불만 있는 게 아닙니다. 붉게 붓지도 아프지도 않으면서 몇 년 낮게 타는 잔불(저등급 만성염증)은 수치가 애매해 검사에 잘 안 걸립니다.
염증이라고 하면 대개 붉게 붓고, 뜨겁고, 욱신거리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삔 발목이나 곪은 상처처럼요. 그것은 크게 타오르는 불입니다. 눈에 보이고, 아프고, 며칠이면 대개 가라앉습니다.
그런데 몸에는 다른 종류의 염증이 있습니다. 크게 타오르지 않고, 잔불처럼 은근하게 오래 남는 염증입니다. 저는 검사는 정상인데 늘 어딘가 무겁고 개운치 않은 분들에게서 이 잔불을 자주 봅니다.
큰 불은 짧고 세게, 잔불은 약하고 길게
큰 불로 타는 염증은 목적이 분명합니다. 다친 자리나 침입한 것을 빠르게 처리하고, 일이 끝나면 스스로 꺼집니다. 붉고 붓고 아픈 것은 그 일이 벌어지는 동안의 모습이고, 나으면 사라집니다. 이것은 몸이 정상적으로 하는 일입니다.
잔불은 다릅니다. 뚜렷한 상처도 없이, 몸 여기저기에서 아주 약한 염증이 꺼지지 않고 낮게 이어집니다. 붉게 붓지도, 심하게 아프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본인도 모르고 지나가기 쉽습니다. 다만 이 잔불이 오래 타면, 그 열기가 혈관 벽을, 대사를, 조직을 조금씩 그을립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몇 년에 걸쳐서요. 이것을 저등급 만성염증이라고 합니다.
잔불은 왜 꺼지지 않을까요
큰 불은 일이 끝나면 꺼지는데, 잔불은 왜 계속 탈까요. 끄는 신호가 잘 안 와서가 아니라, 불씨를 계속 대 주는 자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장의 벽이 조금 헐거워져 안의 물질이 조금씩 새어 나오면, 몸은 그것을 낮게 경계하며 잔불을 켭니다. 늘어난 지방조직이 신호물질을 내보내도, 산화된 지질이나 오래 쌓인 당화 산물이 조직에 남아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하나는 큰 불을 낼 만큼은 아니지만, 여럿이 조금씩 불씨를 대 주면 잔불은 꺼질 틈이 없습니다. 이 책의 1부가 말하는 "여럿이 조금씩 기운다"가 여기서도 그대로입니다.
수치는 기준선 언저리에서만 오릅니다
큰 불은 검사로 잘 잡힙니다. 염증 수치가 뚜렷이 오르고, 특정 세포가 몰립니다. 그런데 잔불은 그 수치를 애매하게, 기준선 언저리에서 조금 올릴 뿐입니다. 한 번 재면 "정상 범위"로 나오기 쉽습니다. 그래서 "검사는 괜찮다는데 늘 몸이 무겁고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 나옵니다. 큰 불이 없다는 것과, 잔불이 없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래서 잔불을 큰 불처럼 끄려 들지 않습니다. 세게 진화할 대상이 아니라, 불씨를 대 주는 자리들을 하나씩 줄여 스스로 사그라들게 하는 쪽을 봅니다. 잘 자고, 잘 움직이고, 장을 편하게 하는 일이 잔불에는 소화기 한 대보다 나을 때가 있습니다.
다만 미열이 오래 이어지거나, 체중이 까닭 없이 줄거나, 밤에 깨울 만큼 아픈 곳이 있다면 — 그것은 잔불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원인을 찾는 검사가 먼저입니다.
몸이 늘 조금 무겁고 개운치 않은데 검사는 별말이 없을 때, 우리는 큰 병이 아니라 다행이라 여기고 넘깁니다.
그 무거움은 큰 불이 없다는 뜻일 뿐, 아무 일도 없다는 뜻은 아닐 수 있습니다. 낮게 오래 타는 잔불이 있다는, 몸의 조용한 보고서일 때가 있습니다.
참고한 자료
- 약한 염증이 낮게 오래 이어지는 저등급 만성염증이 여러 만성질환의 공통 바탕이라는 종설 — Physiology (APS), 2024
- 나이 들며 생기는 낮은 염증(inflammaging)과 대사·노화 질환 — Nature Reviews Endocrinology, 2018
글: 허지영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학 병리학 박사 · 前 경희대 본초학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