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이 쓴 글 건강정보

피는 왜 다친 자리에서만 굳을까요

〈몸이 스스로를 지키는 법〉 · 8편 중 3번째

경희미르애한의원 광진점 대표원장 허지영 프로필 사진
허지영 대표원장 · 한의학 병리학 박사

짧은 답

손끝을 베이면 피가 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 굳는 피가 바로 옆 혈관 안에서는 굳지 않습니다. 답은 굳는 쪽이 아니라 막는 쪽에 있습니다. 혈관 벽이 평소에 굳지 못하게 막고 있다가 다친 자리에서만 그 일을 멈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굳히는 일이 시작되는 순간 녹이는 일도 함께 예약됩니다.

손끝을 베이면 피가 조금 나다가 멎습니다. 누구나 겪는 일이라 따로 생각해 보신 적은 없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물음이 하나 숨어 있습니다. 베인 자리에서는 그렇게 잘 굳는 피가, 왜 바로 옆 혈관 안에서는 굳지 않을까요. 같은 피이고, 굳는 데 필요한 재료도 그대로 들어 있는데 말입니다.

답은 굳는 쪽에 있지 않습니다. 혈관 벽이 평소에 굳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가, 다친 자리에서만 그 일을 멈추는 것입니다.

혈관 벽은 쉬지 않고 말리고 있습니다

혈관 안쪽을 덮은 내피세포는 가만히 있는 벽이 아닙니다. 피가 굳지 않도록 여러 가지를 계속 내보냅니다.

산화질소와 프로스타사이클린을 내어 혈소판이 들러붙지 못하게 하고, 표면에는 응고를 억제하는 단백질을 달고 있습니다. 굳히라는 신호가 와도 그 신호를 반대 방향으로 돌려놓는 장치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니 피가 안 굳는 것은 아무 일도 안 일어나서가 아닙니다. 말리는 일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어서입니다.

벽이 끊기면 그 자리만 조건이 달라집니다

다치면 내피세포의 층이 끊어집니다. 그 아래 있던 결합조직이 피에 드러납니다.

혈소판은 이 드러난 면을 알아보고 달라붙습니다. 붙은 혈소판이 다른 혈소판을 불러 마개를 만듭니다. 먼저 일어나는 지혈입니다.

이어서 응고 단백질들이 차례로 켜지며 피브린이라는 실을 만듭니다. 이 실이 그물처럼 얽혀 혈소판 마개를 붙들어 맵니다. 급히 막아 둔 자리를 단단히 굳히는 일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이 일이 그 자리에서만 벌어진다는 점입니다. 말리던 벽이 끊어진 곳에서만 조건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한 뼘 옆의 멀쩡한 벽은 여전히 말리고 있습니다.

굳히는 일과 함께 녹이는 일이 시작됩니다

여기가 특히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피가 굳기 시작하면 그것을 녹이는 일도 같이 시작됩니다. 굳은 그물 안에 이미 녹이는 쪽 재료가 함께 붙들려 있습니다. 그 재료가 깨어나 피브린 그물을 잘라 냅니다. 이 과정을 섬유소용해라고 부릅니다.

굳히기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상처가 아무는 동안 그물은 버텨 주어야 하지만, 다 아문 뒤에도 남아 있으면 그 자리가 막힙니다. 그래서 몸은 굳히는 일을 시작하면서 치우는 일을 함께 걸어 둡니다.

멍이 며칠에 걸쳐 색이 바뀌다 사라지는 것도 치우는 쪽이 일한 결과입니다. (멍이 잘 드는데 피 검사는 정상이라면)

그래서 지혈은 한 가지 힘이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피가 멎는 일은 여러 층이 시간차를 두고 겹치는 일입니다.

말리는 쪽이 늘 일하고 있고, 다친 자리에서 그 일이 멈추고, 혈소판이 먼저 급히 막고, 응고 단백질이 뒤이어 단단하게 하고, 그와 동시에 녹이는 쪽이 예약됩니다. 어느 하나가 세거나 약해서 정해지는 일이 아니라, 이 층들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우세하게 작동하느냐로 정해집니다.

피가 잘 안 멎는 분도, 멍이 잘 드는 분도, 반대로 잘 뭉치는 분도 이 균형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입니다.

한의학은 두 쪽을 함께 다루었습니다

한의학에는 피를 멎게 하는 쪽 약재와 뭉친 피를 풀어 흐르게 하는 쪽 약재가 따로 있으면서 함께 쓰였습니다.

여기서 읽을 것이 있습니다. 피를 다루는 일을 멎게 하는 것 하나로 보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멎게 하는 일과 흐르게 하는 일을 한 그림 안에 두고, 그 사람이 어느 쪽으로 치우쳐 있는지를 보고 골랐습니다.

지금 보면 그럴 만합니다. 몸이 실제로 그렇게 일하고 있으니까요. 굳히는 쪽과 녹이는 쪽이 함께 걸려 있고, 병은 대개 한쪽이 지나치게 앞설 때 생깁니다. 이름을 몰랐을 뿐 보고 있던 자리는 같았습니다.

진료실에서 제가 묻는 것

저는 피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으면 어느 쪽이 우세한 상태인지를 먼저 나눠 봅니다.

잇몸에서 피가 잘 나는지, 코피가 잦은지, 멍이 언제부터 늘었는지, 생리 양이 달라졌는지를 묻습니다. 드시는 약도 함께 봅니다. 피를 묽게 하는 약이나 소염진통제는 이 균형을 직접 건드립니다.

그리고 오래 앉아 계시는지, 다리가 붓는지를 봅니다. 흐름이 느려지는 것도 한쪽으로 쏠리게 만드는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진료가 먼저인 경우

이유 없이 멍이 갑자기 늘거나, 코피나 잇몸 출혈이 잘 멎지 않거나, 아물었던 상처에서 다시 피가 난다면 검사를 먼저 받으시는 편이 좋습니다. 한쪽 종아리만 붓고 아프면서 단단하게 잡힌다면 곧바로 진료가 필요합니다. 피를 묽게 하는 약을 드시는 분은 임의로 조절하지 마시고 처방한 곳과 상의해 주십시오.


손끝의 상처 하나에 이만한 층이 걸려 있습니다.

한의학은 피를 볼 때 멎게 할 것인지 흐르게 할 것인지를 함께 물었습니다. 한쪽만 다루지 않았고, 그 사람이 어느 쪽에 가까운지를 먼저 살폈습니다. 힘이 센지 약한지를 재는 물음이 아니라, 어느 쪽이 앞서 있는지를 가려내는 물음이었습니다.

지금은 그 자리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말리는 쪽이 늘 일하고, 벽이 끊어진 곳에서만 그 일이 멈추고, 굳히는 일이 시작되는 순간 녹이는 일이 함께 예약됩니다.

피가 멎는 것은 굳는 힘이 이겨서가 아니라, 두 힘이 그 자리에서만 역할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역할 바꿈을 공부해 환자분께 말씀드립니다.


참고한 자료

글: 허지영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학 병리학 박사 · 前 경희대 본초학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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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미르애한의원 광진점 대표원장 허지영 프로필 사진

허지영 대표원장

경희미르애한의원 광진점 · 서울 광진구 자양동 · 구의역 4번 출구

한의학 병리학 박사 · 前 경희대 본초학 학술연구교수

단독 저서 《검사 밖의 몸》 · 《과학의 눈으로 읽는 한의학》 · 직접 쓴 글 229편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병리학(질병의 기전)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같은 대학 본초학 교실에서 학술연구교수로 약물을 연구했습니다. 질병과 약물을 양쪽에서 연구한 이력이 진료의 바탕입니다 — "이 약이 왜 이 병에 듣는가"를 병리와 약리 양쪽 언어로 설명합니다.

자율신경과 만성·난치질환, 체형·구조의 문제를 현대과학의 언어로 설명하고, 원인에 맞는 치료를 제안합니다. 한의사를 대상으로 처방과 임상 강의를 10년 이상 해 왔으며, 저서 《한의사들이 읽어주는 한의학》 공동 저자입니다. 이 책은 2018년 하반기 세종도서 교양부문에 선정되었습니다(기술과학 분야 15종에 포함).

단독 저서로 《과학의 눈으로 읽는 한의학》(2026)과 《검사 밖의 몸》(2026) 두 권을 썼습니다. 앞의 책은 한약이 몸 안에서 어떤 길을 지나는지를 성분과 기전의 이름까지 따라가며 설명했고, 뒤의 책은 검사는 정상이라는데 여전히 불편한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여섯 갈래로 나누어 살폈습니다.

이 글을 쓴 곳

경희미르애한의원 광진점은 서울 광진구 자양동(자양로 46, 오띠모빌딩 2층 201호)에 있습니다. 구의역 4번 출구에서 걸어서 7분입니다. 자율신경·만성통증·난치질환처럼 검사에서 잘 잡히지 않는 불편을 주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