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역세포가 다 돌아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몸이 스스로를 지키는 법〉 · 8편 중 4번째
짧은 답
피 검사에서 백혈구 수치가 높다고 나왔는데 아픈 데는 없으신가요. 피 검사에서 백혈구 수치가 올랐다고 늘 감염은 아닙니다. 백혈구의 상당수는 혈관 벽 가까이에 붙어 대기하고 있어서 채혈에 잡히지 않는데, 긴장하거나 운동하면 이들이 한꺼번에 흐름으로 떨어져 나옵니다. 백혈구가 새로 생긴 것이 아니라 서 있던 자리가 달라졌을 뿐입니다.
목차
"백혈구 수치가 올랐다는데 어디가 아픈 걸까요."
건강검진 결과지를 들고 오셔서 이렇게 물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몸은 멀쩡한데 숫자만 올라 있으니 불안하신 것입니다.
물론 감염이나 염증이 있을 때 오릅니다. 그런데 그것만은 아닙니다. 백혈구가 늘어서가 아니라, 서 있던 자리가 바뀌어서 오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백혈구는 다 흐르고 있지 않습니다
피 속의 백혈구를 떠올리면 대개 혈류를 타고 온몸을 도는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절반쯤 맞습니다.
상당수는 혈관 벽 가까이에 붙어 대기하고 있습니다. 흐름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에 붙어, 벽을 따라 천천히 구르거나 잠시 멈춰 서 있습니다. 이 무리를 변연 저장고라고 부릅니다. 혈관의 가장자리, 곧 변두리에 있다는 뜻입니다.
채혈은 흐르는 피를 뽑습니다. 그러니 벽에 붙어 대기하던 세포는 그 바늘에 잡히지 않습니다. 검사지의 숫자는 처음부터 흐르고 있는 쪽만 센 숫자입니다.
왜 굳이 벽에 붙어 있을까요
여기가 재미있는 대목입니다. 저는 이 배치를 알고 나서 백혈구 수치를 다르게 보게 됐습니다.
일이 벌어지는 곳은 혈관 안이 아니라 조직입니다. 어딘가 다치거나 균이 들어오면, 백혈구는 혈관을 빠져나가 그 조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벽에 붙어야 합니다.
흐름 한가운데를 빠르게 도는 세포는 벽에 붙기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미리 벽 가까이 붙어 있으면 그만큼 빨리 나갈 수 있습니다. 소방차를 차고에 넣어 두지 않고 길가에 대 놓는 것과 비슷합니다.
몸이 이 무리를 따로 두고 있다는 것은, 빨리 나가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긴장하면 한꺼번에 떨어져 나옵니다
대기하던 세포는 필요할 때 벽에서 떨어져 흐름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만드는 신호가 감염에서만 오지는 않습니다.
운동을 세게 하거나, 크게 놀라거나, 긴장이 갑자기 올라갈 때도 그렇습니다. 그때 나오는 아드레날린 같은 신호가 붙잡고 있던 힘을 느슨하게 만들고, 흐름이 빨라지면서 밀어내는 힘도 커집니다. 세포 자체가 조금 물러지면서 벽에서 잘 떨어지게 된다는 것도 확인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검사지의 숫자가 오릅니다. 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세포가 세어지는 쪽으로 옮겨 온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대개 몇십 분 안에 일어나고 지나가면 되돌아옵니다.
그래서 숫자 하나로는 부족합니다
이렇게 보면 백혈구 수치는 몸에 백혈구가 얼마나 있는지가 아니라 지금 몇이 흐르는 쪽에 서 있는지를 알려 주는 값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숫자를 볼 때 언제 재었는지를 함께 봅니다. 검사 직전에 뛰어오셨는지, 검사 자체를 크게 긴장하셨는지, 전날 무리하셨는지. 같은 몸이라도 그 사정에 따라 다른 숫자가 나옵니다. (검사는 그때의 몸을 봅니다)
물론 열이 나거나 아픈 곳이 있으면서 오른 숫자는 다르게 읽어야 합니다. 숫자만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숫자가 의미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한의학이 염증을 적어 둔 방식
한의학은 염증이 생긴 자리를 붉고, 붓고, 열이 나고, 아프다는 넷으로 묶어 적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적은 서술입니다.
그런데 이 넷은 따로 생긴 증상이 아닙니다. 그 자리로 피를 더 보내면 한꺼번에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혈관이 넓어지니 붉어지고 뜨거워지며, 벽이 열려 물이 새 나오니 붓고, 그 과정에서 통증 신호가 켜집니다.
그러니 이 넷을 한 묶음으로 본 것은, 그 자리로 피와 면역을 보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보이는 것만 적었는데, 그 적음이 보내는 일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내려면 먼저 벽에 붙어야 합니다. 벽 가까이 대기하는 무리는 그 보내는 일을 미리 준비해 둔 상태에 가깝습니다.
검사지를 볼 때 제가 하는 일
저는 검사지를 볼 때 숫자보다 그날의 사정과 흐름을 함께 봅니다.
한 번 오른 숫자보다 여러 번 재었을 때의 결이 더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피곤할 때 자주 앓으시는지, 회복이 예전 같지 않은지를 함께 묻습니다. 지키는 힘은 숫자로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피곤할 때가 몸을 살펴야 할 때입니다)
진료가 먼저인 경우
백혈구 수치가 크게 오르거나 내린 상태가 되풀이해 확인되면, 특히 열이 이어지거나 이유 없이 체중이 줄거나 멍이 함께 늘어난다면 진료가 먼저입니다. 한 번의 숫자보다 되풀이되는 결과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백혈구 수치를 그 숫자 하나로만 읽지 않습니다.
한의학은 염증이 생긴 자리를 볼 때 무엇이 그리로 몰려가고 있는가를 읽었습니다. 붉고 붓고 뜨겁고 아픈 것을 한 묶음으로 묶은 서술이 그렇습니다. 몇 개가 있느냐를 센 것이 아니라 어디로 향하고 있느냐를 본 것입니다.
지금은 그 향함이 어떻게 준비되는지까지 볼 수 있습니다. 벽 가까이 붙어 대기하는 무리가 있고, 신호가 오면 떨어져 나오고, 그래서 채혈에 잡히는 숫자가 달라집니다.
세포가 몇인지보다 어디에 서 있는지가 그날의 몸을 말해 줍니다. 검사지의 숫자를 그렇게 읽어 드리는 것이 제가 하는 일입니다.
참고한 자료
- 백혈구의 상당수가 혈관 벽에 붙어 대기하다가 신호에 따라 흐름으로 돌아오며, 그 이동이 검사 수치를 바꾼다는 것을 정리한 종설 — Journal of Leukocyte Biology, 2009
- 세포가 물러지는 것이 벽에서 떨어져 나오는 과정을 이끌며, 그 결과 임상 혈액 수치가 올라간다는 것을 보인 연구 —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2016
글: 허지영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학 병리학 박사 · 前 경희대 본초학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