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할 때가 몸을 살펴야 할 때입니다
〈몸이 스스로를 지키는 법〉 · 8편 중 5번째
짧은 답
저는 진료실에서 피곤하실 때 특히 조심하시라고 말씀드립니다. 피로는 한 가지 신호가 아니라 여러 갈래가 같은 얼굴로 나타나는 상태이고, 그때 몸의 방어가 함께 느슨해지기 때문입니다. 대상포진이 피곤할 때 오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목차
진료실에서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피곤하실 때 특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피로는 몸이 느슨해졌다는 신호이고, 그 느슨함이 한 군데서만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피로는 한 가지 신호가 아닙니다
피곤하다는 말 뒤에는 서로 다른 사정들이 들어 있습니다.
긴장이 길게 이어져서 그럴 수도 있고, 쓸 에너지가 모자라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칼슘을 비롯한 무기질이 모자라도 피로감이 함께 옵니다. 조직에 피가 덜 가도 그렇습니다. 몸의 조절을 맡은 갑상선 같은 기관이 흔들려도 피로와 부기가 같이 나타납니다.
서로 다른 갈래인데 나타나는 얼굴은 비슷합니다. 그래서 피로는 원인을 짚기 어려운 증상이면서, 동시에 여러 자리를 한꺼번에 살펴봐야 하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긴장이 길어지면 방어가 느슨해집니다
이 가운데 몸의 방어와 곧바로 얽히는 것이 긴장이 길게 이어지는 상태입니다.
긴장이 이어지면 교감신경이 계속 켜져 있게 됩니다. 이 상태가 오래가면 면역을 맡은 세포들의 수와 활동이 달라집니다. 특히 세포성 면역 — 감염된 세포를 알아보고 처리하는 쪽 — 이 눌립니다.
몸이 싸우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평소만큼 촘촘하게 지키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피곤할 때 오는 병이 있습니다
대상포진이 대표적입니다.
어릴 때 수두를 앓고 나면 그 바이러스가 사라지지 않고 신경절에 조용히 남습니다. 평생 거기 있습니다. 그것을 눌러 두는 것이 앞서 말씀드린 세포성 면역입니다. 그 힘이 느슨해지면 바이러스가 다시 깨어납니다.
*"피곤하면 대상포진이 온다"*는 말이 경험담만은 아닙니다. 잠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오래 추적한 연구에서 대상포진이 더 자주 나타났고, 스트레스를 크게 느낀다고 답한 사람들에게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감기도 비슷한 자리에 있습니다. 바이러스를 만나는 것과 그것이 병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이고, 그 사이를 가르는 것이 그때 몸의 형편입니다. (환절기마다 같은 자리가 먼저 무너집니다)
재 봐야 아는 피로도 있습니다
한 가지는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피로 가운데는 검사로 확인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갑상선 기능, 빈혈, 호르몬 쪽은 이야기만 듣고는 알 수 없고 재 봐야 압니다. 쉬어도 나아지지 않는 피로, 몇 달째 이어지는 피로라면 먼저 확인해 보시는 편이 좋습니다. 그 결과를 알고 나면 손볼 자리가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저는 잠과 끼니를 먼저 말씀드립니다
피곤할 때 무엇을 하시라고 말씀드리느냐면, 대개 잠과 끼니입니다.
싱거운 조언처럼 들리지만 이유가 있습니다. 잠은 방어를 다시 세우는 시간이고, 끼니는 그 재료를 대는 일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갈래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 둘로 되돌아옵니다. 무기질도, 에너지도, 긴장을 내려놓는 일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피곤한 때야말로 그 둘이 먼저 무너지는 때입니다. 바쁘니까 늦게 자고, 바쁘니까 끼니를 거릅니다. 몸이 지켜 달라고 신호를 보내는 바로 그때에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피곤하시다는 말씀을 가볍게 넘기지 않습니다. 그때가 무리를 줄이고 몸을 살필 때입니다.
진료가 먼저인 경우
한쪽에 띠 모양으로 따끔거리는 통증이나 물집이 생기면 되도록 빨리 진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초기에 손쓰는 것과 늦게 손쓰는 것의 차이가 큽니다. 쉬어도 나아지지 않는 피로가 오래간다면 검사를 먼저 받아 보십시오.
피곤하다는 말 한마디에 이만한 일이 걸려 있습니다.
한의학에는 약해진 자리로 탈이 든다는 오래된 관점이 있습니다. 바깥의 무엇이 세서가 아니라 안이 성글어졌을 때 병이 자리를 잡는다고 보았고, 그래서 무리한 뒤를 늘 조심하라 일렀습니다.
지금은 그 사이를 좀 더 그려 볼 수 있습니다. 긴장이 길어지면 지키는 쪽이 눌리고, 눌리면 잠들어 있던 것이 깨어납니다. 바이러스가 세진 것이 아니라 지키는 힘이 얇아진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이 옛 관점과 지금 면역학이 가장 가까이 만나는 자리 가운데 하나라고 봅니다. 그래서 피곤하시다는 말씀을 가볍게 넘기지 않습니다.
참고한 자료
- 잠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서 대상포진이 더 자주 나타났다는 것을 131,001명을 추적해 확인한 연구 — Medicine, 2016
- 스트레스를 크게 느낀다고 답한 사람들에게서 대상포진 위험이 더 높았고, 세포성 면역이 눌리는 것을 그 경로로 본 연구 — British Journal of Dermatology, 2021
글: 허지영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학 병리학 박사 · 前 경희대 본초학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