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먹느냐가 약을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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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약을 지어 드리면서 "이건 아침에, 이건 자기 전에 드세요"라고 말씀드리면, 가끔 이렇게 되물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옛 책들은 복용 시각을 꽤 꼼꼼히 적어 두었습니다. 저는 오래 그것을 경험이 굳어진 규칙으로 읽어 왔습니다. 그런데 시간생물학 쪽 자료를 보다 보니, 그 규칙이 딛고 선 자리가 생각보다 단단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몸에는 시계가 있습니다 — 비유가 아니라 유전자로
우리 몸의 세포에는 실제로 시계 역할을 하는 유전자가 있습니다. 낮과 밤에 따라 단백질이 쌓였다가 분해되기를 반복하면서 하루 주기를 만들어 냅니다.
이것은 가설이 아닙니다. 이 시계 장치의 작동 방식을 밝힌 연구자들이 2017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고, 지금은 생물학의 기본 지식에 속합니다.
여기까지는 많은 분이 아십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다음입니다.
약이 지나가는 길도 하루 종일 달라집니다
사람의 조직을 대규모로 분석한 연구가 있습니다. 열세 개 조직, 632명의 자료를 본 것입니다.
약 7,500개의 유전자가 하루 주기로 오르내리고 있었고, 그중 917개가 약물의 표적이거나, 약을 나르는 수송체거나, 약을 분해하는 효소였습니다. 이 유전자들과 연결된 약이 2,700가지가 넘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약이 몸에서 지나가는 길 자체가 아침과 저녁에 다른 상태라는 것입니다. 흡수되고, 운반되고, 분해되어 나가는 그 경로가요.
같은 약을, 같은 양으로, 다른 시각에 넣으면 — 몸이 그것을 다르게 처리합니다.
도착 시각만 바꿔 본 실험
사람에게서 확인된 것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류마티스 관절염을 앓는 분들은 아침에 관절이 뻣뻣한 것으로 고생하십니다. 그런데 이 강직은 아침에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새벽 두 시부터 일곱 시 사이에 염증 신호 물질이 올라가고, 그 결과가 아침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구자들이 이런 시도를 했습니다. 약도 같고 용량도 같은데, 알약이 새벽 두 시에 풀리도록 만든 것입니다. 잠들기 전에 먹으면 새벽에 방출되는 방식이지요.
288명을 대상으로 한 이중맹검 시험에서 아침 강직이 뚜렷하게 줄었습니다. 같은 약을 보통 방식으로 먹은 쪽은 거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통계적으로는 아슬아슬하게 유의한 수준이었고 하나의 시험이지만, 저는 이 설계를 좋아합니다. 약을 바꾼 것도, 양을 늘린 것도 아니고, 도착 시각만 바꿨으니까요.
새벽과 겨울에 통증이 심해지는 것을 두고 오래전부터 이야기해 온 것도 이런 리듬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 겨울과 새벽에 더 아픈가)
다만 모든 약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시각이 결정적인 약이 있고, 별 상관이 없는 약도 있습니다. 혈압약처럼 아침에 먹으나 저녁에 먹으나 결과가 다르지 않았던 경우도 있습니다. 약마다, 병마다 따져 봐야 합니다.
그러니 지금 드시는 약의 복용 시간을 이 글을 읽고 스스로 옮기지는 말아 주십시오. 어떤 약은 복용 간격 자체가 안전과 직결됩니다. 조정이 필요하다고 느끼시면 그 약을 처방한 곳에 먼저 여쭤 주십시오. (한약과 양약을 같이 먹어도 될까)
장에 사는 세균에게도 리듬이 있습니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것이 있습니다. 우리 장에 사는 세균도 하루 주기로 그 구성과 하는 일이 달라진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식사 시간에 맞춰 리듬이 생긴다는 것이지요. 아직 동물 실험 단계입니다.
이것이 왜 제 눈에 들어왔냐면, 한약 성분 가운데 장내세균이 열어 주어야 비로소 작동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장이 켜 주어야 작동하는 약)
열쇠를 쥔 세균에게 리듬이 있다면, 약을 넣는 시각이 그 열쇠가 잘 돌아가는 때와 맞느냐도 변수가 될 수 있겠지요. 여기까지는 아직 제 추측입니다. 사람에게서 "그래서 한약은 몇 시에 먹어야 한다"를 보여 준 연구는 못 봤습니다.
그래서 진료실에서는
증상이 하루 중 언제 심해지는지를 물어봅니다. 아침에 뻣뻣한지, 오후에 무너지는지, 새벽에 깨는지. 이건 단순한 문진이 아니라 정보입니다. 몸의 리듬 중 어디가 흔들리는지를 알려 주니까요. (만성 질환에는 시간 축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 복용 시각을 함께 정합니다. 지키기 어려운 시각이면 말씀해 주십시오. 지키지 못할 시각을 정해 두는 건 의미가 없으니, 사정에 맞춰 다시 정하는 편이 낫습니다.
언제 먹느냐는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몸이 하루 종일 같은 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옛 책에 적힌 복용법을 저는 이제 관습으로 보지 않습니다. 관찰의 기록으로 봅니다. 다만 관찰이 곧 증명은 아니어서, 하나씩 확인해 가는 중입니다.
참고한 자료
- 사람 13개 조직·632명 분석 — 약물 표적·수송체·대사효소가 하루 주기로 변동한다 — Science Translational Medicine, 2018
- 같은 약·같은 용량에서 방출 시각만 새벽으로 바꾼 이중맹검 시험 — Lancet, 2008
- 생체시계 유전자의 작동 방식 — 2017년 노벨생리의학상 — NobelPrize.org
글: 허지영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학 병리학 박사 · 前 경희대 본초학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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