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은 손발이 따뜻해지며 옵니다
짧은 답
잠은 손발이 따뜻해지며 옵니다. 손발의 혈관이 열려 열을 내보내고 몸 중심 온도가 내려가야 잠으로 들어갑니다. 손발이 차면 그 창문이 잘 안 열립니다.
아이가 졸리기 시작하면 손이 따뜻해지고 귀가 발그레해집니다. 어른도 잠이 밀려올 때 손발이 노곤하게 더워집니다. 반대로 손발이 차가운 밤에는 이불 속에서 한참을 뒤척입니다. 저는 이 흔한 경험이 잠이 어떻게 오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잠은 몸의 중심 온도가 내려갈 때 옵니다
우리는 잠을 '뇌가 스위치를 끄는 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잠이 오려면 몸에서 먼저 벌어져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몸 중심의 온도가 조금 내려가는 것입니다.
몸은 겉과 속의 온도가 다릅니다. 우리가 재는 체온은 대개 몸속 깊은 곳의 온도, 곧 심부 체온입니다. 이 심부 체온은 하루 동안 오르내리는데, 잠들 무렵이 되면 살짝 떨어집니다. 그 하강이 잠으로 들어가는 신호 가운데 하나입니다.
손발은 그 열을 내보내는 창문입니다
그럼 중심의 열을 어떻게 내릴까요. 여기서 손발이 등장합니다.
잠들 무렵이 되면 손발의 혈관이 열립니다. 따뜻한 피가 손발로 몰리면서 그곳으로 열을 바깥에 내보냅니다. 손발이 따뜻해지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겉(손발)이 더워지는 만큼 속(심부)의 열이 빠져나가 중심 온도가 내려갑니다. 그렇게 온도가 내려가면 잠이 옵니다. 손발은 잠들기 위해 열어 두는 창문인 셈입니다.
그러니 손발이 따뜻해지는 것은 잠이 온다는 결과이자, 동시에 잠을 오게 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손발이 차면 잠들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보면, 손발이 찬 사람이 잠들기 힘든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창문이 잘 안 열리는 것입니다.
손발의 혈관이 잘 열리지 않으면 열이 바깥으로 빠지지 못하고, 그러면 중심 온도가 잘 안 내려가 잠으로 들어가는 신호가 약해집니다. "피곤한데 손발이 차서 잠이 안 온다"는 말이 그래서 나옵니다. 자기 전에 따뜻한 물에 손발을 담그거나 양말을 신으면 잠이 잘 오는 것도 같은 자리입니다. 겉을 데워 혈관을 열면, 오히려 속의 열이 잘 빠져 중심 온도가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겉을 덥혀 속을 식히는 셈입니다.
잠의 구조와, 잠으로 드는 과정은 다릅니다
수면을 재는 검사는 잠의 시간과 단계를 봅니다. 그런데 잠들 무렵 손발이 열려 중심 온도가 내려가는지는 재지 않습니다. 그래서 "검사상 큰 문제는 없다는데 유독 잠들기가 어렵다"는 일이 생깁니다. 잠의 구조와, 잠으로 들어가는 그 문턱은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손발이 늘 차고 저리며 색이 변하거나, 낮에도 견디기 힘들 만큼 졸리다면 — 그것은 이 이야기를 넘어선 신호일 수 있습니다. 순환과 수면을 확인하는 진료가 먼저입니다.
잠이 오는 것을 우리는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일로만 압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손발이 조용히 열을 내보내며 몸의 중심을 식히고 있습니다.
손발이 차서 잠들기 어려운 밤은, 의지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잠으로 들어가는 창문이 잘 열리지 않는다는 몸의 신호일 수 있습니다.
참고한 자료
- 손발 혈관이 열려 열을 내보내고 중심 체온이 내려갈수록 잠이 빨리 온다 — Am J Physiol Regul Integr Comp Physiol, 2000
- 자기 전 따뜻하게 데우면 열 배출이 늘어 입면이 빨라진다 — Scientific Reports, 2020
글: 허지영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학 병리학 박사 · 前 경희대 본초학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