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이 쓴 글 맞춤 한약 · 보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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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이 세균을 켜기도 하고, 세균이 사는 동네를 고치기도 합니다

경희미르애한의원 광진점 대표원장 허지영 프로필 사진
글 · 의료 내용 확인 허지영 대표원장 · 한의학 병리학 박사

짧은 답

장내세균이 약을 활성화한다는 이야기는 많이 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반대 방향도 있습니다. 약이 장의 환경을 바꿔 놓으면, 거기 사는 세균의 구성이 달라지고, 그 결과로 점막 세포가 살아납니다. 이건 약을 켜는 이야기가 아니라 동네를 고치는 이야기입니다.

한약과 장내세균 이야기를 하면 대개 이 방향입니다. 세균이 약을 켠다. 당이 붙어 잠긴 성분을 세균이 열어 줘야 비로소 약이 된다는 이야기요. (같은 약도 장이 다르면 다르게 듣습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화살표가 한쪽으로만 그려져 있습니다.

오늘은 반대 방향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세균은 동네에 삽니다

장 속은 하나의 동네입니다. 산도가 있고, 먹을 것이 있고, 산소가 얼마나 있는지가 정해져 있고, 점막이 얼마나 성한지가 있습니다. 세균은 그 조건 위에서 삽니다.

동네가 바뀌면 사는 주민이 바뀝니다. 어떤 균은 늘고 어떤 균은 줍니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여기서 따라오는 게 있습니다.

동네를 바꾸면 주민 구성이 바뀌고, 주민이 바뀌면 그들이 만들어 내는 것도 바뀝니다.

세균은 점막을 먹여 살립니다

장 점막 세포는 좀 특이합니다. 자기 밥을 혈액에서만 받지 않습니다.

장 속에 사는 어떤 세균들은 섬유질을 먹고 짧은사슬지방산이라는 것을 내놓습니다. 그 물질이 점막 세포의 먹이가 됩니다. 세균이 만들어 준 것을 점막이 받아먹습니다.

그냥 곁들이는 밥이 아닙니다. 사람 대장 세포를 떼어 재 보니, 쓰는 에너지의 4분의 3가량을 이 물질에서 얻고 있었습니다. 혈액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장 속 세균이 만들어 준 것을요.

그러니 동네가 무너지면 점막이 굶습니다. 주민이 바뀌어 그 물질을 만드는 균이 줄면, 점막 세포에게 갈 밥이 줄어듭니다. 점막이 얇아지고 헐거워집니다.

설사가 오래된 분, 항생제를 오래 쓰신 분의 장이 잘 안 낫는 데는 이런 사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약이 하는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여기까지 오면 약이 할 수 있는 일이 둘로 갈립니다.

하나는 세균을 통해 자기가 켜지는 것. 잠긴 성분이 열려서 몸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세균이 사는 동네를 손보는 것. 산도를 바꾸고, 점막의 상태를 바꾸고, 먹을 것의 구성을 바꿔서 — 주민이 달라지게 만드는 일입니다. 이건 약이 표적에 가서 무언가를 누르는 게 아닙니다. 약은 환경만 바꾸고, 실제 일은 주민이 합니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를 밀어 줍니다. 동네가 좋아지면 약을 켜 주는 균도 늘어납니다. 그러면 다음에 드시는 약이 더 잘 켜집니다. 동물에서 실제로 그렇게 관찰됐습니다 — 같은 약을 4주 동안 주니, 뒤로 갈수록 몸에 들어오는 활성 성분이 늘었습니다. 약이 자기가 잘 들을 동네를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이게 왜 다른 이야기인가

두 가지가 다릅니다.

속도가 다릅니다. 약이 켜져서 들어오는 건 몇 시간입니다. 동네가 바뀌는 건 며칠, 몇 주입니다. 그래서 장을 다루는 약은 늦게 옵니다. 먹고 바로 안 느껴진다고 안 듣는 게 아닙니다.

약을 끊은 뒤가 다릅니다. 켜져서 들어온 성분은 나가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동네는 다릅니다 — 약을 끊는다고 원래대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그때부터는 드시는 것이 동네를 정합니다.

그래서 저는 약으로 동네를 바꿔 놓는 것을 끝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약이 만든 자리를 밥이 이어받아야 합니다. 약만 끊고 먹던 대로 돌아가시면 동네도 따라 돌아갑니다. 제가 약을 줄여 가며 생활을 함께 잡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약을 끊으면 다시 돌아오는 병)

약보다 동네를 먼저 봅니다

장이 무너져 있으면 약보다 장을 먼저 봅니다. 동네가 엉망인데 좋은 약을 넣어 봐야, 켜 줄 주민도 없고 받아먹을 점막도 헐어 있습니다.

시간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이 방향으로 가는 약은 며칠 만에 극적으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걸 모르고 드시면 "안 듣는다"고 판단하고 그만두시게 됩니다.

드시는 것을 함께 봅니다. 동네의 먹을 것은 약보다 밥이 더 많이 정합니다. 약만 바꾸고 나머지를 그대로 두면 동네도 그대로입니다.


세균이 약을 켠다 — 맞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화살표가 한 방향만 있는 게 아닙니다.

약이 동네를 고치고, 동네가 주민을 바꾸고, 주민이 점막을 먹이고, 그 점막이 다음 약을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한 바퀴가 돕니다. 한약이 하는 일을 한 줄로 그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습니다. (한약은 무엇을 하는가)


참고한 자료

글: 허지영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학 병리학 박사 · 前 경희대 본초학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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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미르애한의원 광진점 대표원장 허지영 프로필 사진

허지영 대표원장

경희미르애한의원 광진점 · 서울 광진구 자양동 · 구의역 4번 출구

한의학 병리학 박사 · 前 경희대 본초학 학술연구교수

단독 저서 《몸을 돌려놓는 한약》 · 《검사 밖의 몸》 · 《과학의 눈으로 읽는 한의학》 · 직접 쓴 글 284편

이력 펼쳐보기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병리학(질병의 기전)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같은 대학 본초학 교실에서 학술연구교수로 약물을 연구했습니다. 질병과 약물을 양쪽에서 연구한 이력이 진료의 바탕입니다 — "이 약이 왜 이 병에 듣는가"를 병리와 약리 양쪽 언어로 설명합니다.

몸을 다층으로 보고, 환경 변화에 적응해 돌아오는 힘(회복 탄력성)을 살피며, 적응이 안 될 때는 몸 안의 환경 쪽을 손대는 것 — 이 세 관점이 진료의 바탕입니다. 자율신경과 만성·난치질환, 체형·구조의 문제를 현대과학의 언어로 설명하고, 원인에 맞는 치료를 제안합니다. 한의사를 대상으로 처방과 임상 강의를 10년 이상 해 왔으며, 저서 《한의사들이 읽어주는 한의학》 공동 저자입니다. 이 책은 2018년 하반기 세종도서 교양부문에 선정되었습니다(기술과학 분야 15종에 포함).

단독 저서로 《과학의 눈으로 읽는 한의학》(2026), 《검사 밖의 몸》(2026), 《몸을 돌려놓는 한약》(2026) 세 권을 썼습니다. 첫 책은 한약이 몸 안에서 어떤 길을 지나는지를 성분과 기전의 이름까지 따라가며 설명했고, 두 번째 책은 검사는 정상이라는데 여전히 불편한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여섯 갈래로 나누어 살폈습니다. 세 번째 책은 그 몸이 어디서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는지를 자율신경, 만성 대사성 질환, 만성 통증, 여성의 몸, 아이와 청소년, 노년기, 낫지 않는 병의 일곱 갈래로 봅니다.

이 글을 쓴 곳

경희미르애한의원 광진점은 서울 광진구 자양동(자양로 46, 오띠모빌딩 2층 201호)에 있습니다. 구의역 4번 출구에서 걸어서 7분입니다. 자율신경·만성통증·난치질환처럼 검사에서 잘 잡히지 않는 불편을 주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