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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대신하는 약, 몸을 깨우는 약

〈약이 몸에서 하는 일〉 · 10편 중 7번째

경희미르애한의원 광진점 대표원장 허지영 프로필 사진
글 · 의료 내용 확인 허지영 대표원장 · 한의학 병리학 박사

짧은 답

한약은 평생 먹어야 하나요? 몸이 다시 할 수 있는 일을 돕는 치료도 있지만, 모든 약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혈압·혈당 조절이 어렵거나 감염이 퍼지는 때에는 처방받은 약을 유지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혈압약을 드시는 분에게 "언제 끊을 수 있나요"라고 물으면, 대개 "평생"이라는 답을 들으셨을 겁니다.

이 말은 그 약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약이 자기 일을 정확히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약은 혈압을 내리는 일을 몸 대신 해 줍니다. 대신해 주는 동안 몸은 그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약을 멈추면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저는 이것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상황이 분명히 있습니다. 혈압이 위험할 만큼 높다면 몸이 스스로 조절하기를 기다릴 여유가 없습니다. 대신해 주는 약은 그때 생명을 지킵니다.

다만 저는 다른 종류의 약도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몸이 할 일을 대신하지 않고, 몸이 다시 그 일을 하도록 만드는 약입니다.


몸을 대신하면 몸은 일을 그만둡니다. 몸을 조금 흔들면 몸은 더 잘합니다. 저는 한약을 두 번째 방식으로 씁니다.

두 가지 방식

대신하는 약 깨우는 약
무엇을 하는가 몸이 못 하는 일을 대신 수행 몸이 다시 하도록 자극
몸의 반응 그 기능을 쉰다 그 기능이 되살아난다
멈추면 원래대로 돌아간다 유지되는 경우가 있다
필요한 농도 확실히 작용할 만큼 충분히 몸이 알아챌 만큼만 적게
잘 맞는 상황 급하고 위험할 때 오래되고 서서히 무너졌을 때

두 방식 모두 필요합니다. 어느 쪽이 우월한 것이 아니라, 상황이 다릅니다.

적게 주면 더 잘하게 되는 이유

여기서 이상한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작은 스트레스는 몸을 강하게 만듭니다.

운동을 생각해 보십시오. 운동은 근육을 손상시킵니다. 그런데 그 손상 뒤에 근육은 이전보다 강해집니다. 몸이 "이 정도 부담이 또 오겠구나" 하고 대비하기 때문입니다.

햇볕도 그렇습니다. 적당히 쬐면 피부가 스스로를 지킬 준비를 합니다. 지나치면 화상을 입습니다.

같은 자극인데 양에 따라 결과가 반대입니다. 이것을 호메시스라고 부릅니다.

   자극의 크기
   ────────────────────────────────────→
        작다        적당        지나치다
          │           │            │
          ▼           ▼            ▼
      변화 없음    더 강해짐      손상됨
                  (몸이 대비)   (몸이 버팀)

중요한 것은 가운데 구간입니다. 이 구간에서는 약이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이 일합니다. 약은 그저 "준비하라"는 신호를 건넸을 뿐입니다.

한약의 낮은 농도가 약점이 아닌 이유

저는 다른 글에서 농도의 역설을 말씀드렸습니다. 한약 성분이 혈액에 남는 농도는 현대 약물의 기준으로 보면 놀랄 만큼 낮은데도, 몸은 분명히 반응합니다.

호메시스의 관점에서 보면 이 역설이 달리 보입니다.

몸을 대신하려면 농도가 충분해야 합니다. 몸을 깨우려면 알아챌 만큼이면 됩니다.

수용체를 붙잡아 눌러 놓으려면 그 수용체를 다 덮을 만큼의 물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기 뭔가 있다"고 알리는 데는 훨씬 적은 양으로 충분합니다.

한약이 낮은 농도로 작동한다는 것은 약이 약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다른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몸이 신호를 알아채면 스스로 준비를 시작합니다.

  • 산화 스트레스를 처리하는 자기 방어 체계를 미리 켭니다
  • 낡은 부품을 치우고 새로 만드는 청소와 재생을 돌립니다
  • 과하게 흥분해 있던 염증 반응을 스스로 낮춥니다

이 일들은 모두 몸이 원래 할 줄 아는 일입니다. 다만 오래 내버려 두면 몸이 그 일을 그만둡니다. 약은 그 스위치를 다시 켜 줄 뿐입니다.

그래서 약을 끊고도 유지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몸이 그 일을 다시 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이 논리는 매우 위험하게 오용될 수 있습니다.

"적게 쓰면 좋다"는 말은 "무엇이든 적게 쓰면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독은 적게 써도 독입니다. 호메시스가 성립하는 물질과 성립하지 않는 물질이 있습니다.

그리고 적정 구간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분에게 몸을 깨우는 양이, 다른 분에게는 몸을 상하게 하는 양입니다. 이미 지쳐 있는 몸에는 작은 자극도 부담입니다.

오래 굶주린 사람에게 갑자기 많은 음식을 주면 탈이 납니다. 오래 멈춰 있던 몸에 강한 자극을 주면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그 구간을 가늠하는 일이 진료입니다. 약재의 이름을 아는 것과, 이 사람에게 지금 어느 만큼이 적당한지 아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명현 반응"이라는 말에 대하여

이 대목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말이 있습니다.

한약을 드시고 불편한 증상이 생겼다면, 그것은 참고 넘길 일이 아닙니다.

호메시스는 "아프면 좋아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몸이 알아챌 만큼의 자극은 대개 견딜 만합니다. 견디기 어려울 만큼의 반응이라면, 그것은 이미 적정 구간을 넘었다는 신호입니다.

  • 붓거나 혈압이 오른다
  • 가슴이 두근거리고 맥이 고르지 않다
  • 입술이나 손발이 저리다
  • 유난히 기운이 빠진다

이런 증상은 좋아지는 과정이 아닙니다. 약을 멈추고 알려 주셔야 합니다.

판단은 참는 쪽이 아니라 확인하는 쪽이어야 합니다. 확인해서 아무 일도 아니면 그것으로 좋고, 아니라면 일찍 손을 쓸 수 있습니다.

대신하는 약이 필요할 때

마지막으로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몸을 깨우는 방식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닙니다.

혈압이 위험한 높이라면, 혈당이 조절되지 않는다면, 감염이 번지고 있다면 — 몸이 스스로 해내기를 기다릴 시간이 없습니다. 그때는 대신해 주는 약이 옳습니다. 그런 분은 드시던 약을 그대로 유지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제가 맡는 자리는 다른 곳입니다. 검사에서 큰 이상은 없는데 오래 힘든 분, 급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무너져 온 분, 대신해 주는 약을 쓰면서도 몸이 스스로 할 수 있는 부분을 되찾고 싶은 분.

두 가지는 다투는 관계가 아닙니다. 다만 어느 쪽이 지금 이 사람에게 필요한지 판단하는 일이 남을 뿐입니다.


호메시스는 생물학에서 널리 관찰되는 현상입니다. 운동, 단식, 열, 저산소 — 모두 적당한 자극이 몸의 대비 능력을 높입니다.

한약이 이 원리로 작동하는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실험실과 동물 연구가 뒷받침하지만, 사람에게서 "이 약재가 이 경로로 이만큼" 확인된 것은 많지 않습니다.

또한 이 틀로 설명되지 않는 한약의 작용도 있습니다. 어떤 약재는 꽤 직접적으로 작용합니다.

저는 이 틀을 진료실에서 본 것이 잘 설명되기 때문에 쓰고 있습니다.


환자분들이 자주 물으십니다. "이 약, 평생 먹어야 하나요?"

저는 이렇게 답하려 합니다.

"그건 병에 따라 다릅니다. 몸이 그 일을 다시 하게 되는 만큼, 제 약이 할 몫은 줄어듭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약을 쓰는 것 — 그것이 제가 이 일을 하는 이유에 가깝습니다.


글: 허지영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학 병리학 박사 · 前 경희대 본초학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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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미르애한의원 광진점 대표원장 허지영 프로필 사진

허지영 대표원장

경희미르애한의원 광진점 · 서울 광진구 자양동 · 구의역 4번 출구

한의학 병리학 박사 · 前 경희대 본초학 학술연구교수

단독 저서 《몸을 돌려놓는 한약》 · 《검사 밖의 몸》 · 《과학의 눈으로 읽는 한의학》 · 직접 쓴 글 284편

이력 펼쳐보기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병리학(질병의 기전)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같은 대학 본초학 교실에서 학술연구교수로 약물을 연구했습니다. 질병과 약물을 양쪽에서 연구한 이력이 진료의 바탕입니다 — "이 약이 왜 이 병에 듣는가"를 병리와 약리 양쪽 언어로 설명합니다.

몸을 다층으로 보고, 환경 변화에 적응해 돌아오는 힘(회복 탄력성)을 살피며, 적응이 안 될 때는 몸 안의 환경 쪽을 손대는 것 — 이 세 관점이 진료의 바탕입니다. 자율신경과 만성·난치질환, 체형·구조의 문제를 현대과학의 언어로 설명하고, 원인에 맞는 치료를 제안합니다. 한의사를 대상으로 처방과 임상 강의를 10년 이상 해 왔으며, 저서 《한의사들이 읽어주는 한의학》 공동 저자입니다. 이 책은 2018년 하반기 세종도서 교양부문에 선정되었습니다(기술과학 분야 15종에 포함).

단독 저서로 《과학의 눈으로 읽는 한의학》(2026), 《검사 밖의 몸》(2026), 《몸을 돌려놓는 한약》(2026) 세 권을 썼습니다. 첫 책은 한약이 몸 안에서 어떤 길을 지나는지를 성분과 기전의 이름까지 따라가며 설명했고, 두 번째 책은 검사는 정상이라는데 여전히 불편한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여섯 갈래로 나누어 살폈습니다. 세 번째 책은 그 몸이 어디서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는지를 자율신경, 만성 대사성 질환, 만성 통증, 여성의 몸, 아이와 청소년, 노년기, 낫지 않는 병의 일곱 갈래로 봅니다.

이 글을 쓴 곳

경희미르애한의원 광진점은 서울 광진구 자양동(자양로 46, 오띠모빌딩 2층 201호)에 있습니다. 구의역 4번 출구에서 걸어서 7분입니다. 자율신경·만성통증·난치질환처럼 검사에서 잘 잡히지 않는 불편을 주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