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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2026년 7월 15일

한약은 한 곳을 누르지 않습니다 — 여러 층에서 동시에 일하는 약

경희미르애한의원 광진점 대표원장 허지영 프로필 사진
의료 감수 허지영 대표원장

'약이 듣는다'고 하면 흔히 한 곳을 정확히 누르는 장면을 떠올립니다. 한 성분이 한 표적에 딱 붙어 한 가지 문제를 끈다 — 현대 신약의 상당수가 이런 방식으로 설계됩니다.

한약은 그렇게 생기지 않았습니다. 한 첩에는 여러 약재가 들어가고, 약재 하나에도 여러 성분이 들어 있으며, 그 성분들은 저마다 몸의 다른 지점을 건드립니다. 저는 이것을 한약의 약점이 아니라 성질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 성질을 저는 다층작용이라고 부릅니다.

이 글은 그동안 따로따로 말씀드린 이야기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지도입니다. 각 층의 자세한 이야기는 해당 글로 연결해 두었습니다.

먼저, 한약은 무엇을 하려는 약인가

저는 한약을 망가진 부품을 갈아 끼우는 약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몸이 스스로 수리할 수 있도록 내부 환경을 되돌리는 약에 가깝다고 봅니다. (물론 부품이 실제로 망가지는 병도 있습니다. 이분법은 곤란합니다.) 몸을 대신해 브레이크를 밟아 주는 약과, 몸이 스스로 밟게 돕는 약은 다릅니다. (몸을 대신하는 약, 몸을 깨우는 약)

그 '환경'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물리(압력·장력), 화학(산-염기), 대사, 면역, 신경, 순환 — 여러 축이 있습니다. 어느 하나가 대장이 아닙니다. 병마다 먼저 기울어진 축이 다릅니다. 그래서 약도 한 축만 세게 밀지 않고, 여러 층을 동시에 조금씩 움직입니다.

아래가 제가 보는 그 층들입니다.

층 1 — 잠긴 성분을 여는 곳: 장

한약재의 유효 성분 상당수는 당이 붙어 '잠긴' 형태로 들어옵니다. 이것을 여는 것은 약이 아니라 장에 사는 미생물입니다. 그래서 같은 약도 장이 다르면 다르게 듣습니다. (같은 한약인데 왜 사람마다 다르게 들을까 · 장이 켜 주어야 작동하는 약)

층 2 — 아픈 자리에서 깨어나는 곳: 산성 환경

염증이 생긴 자리는 젖산이 쌓여 산성으로 기웁니다. 그 산성이 장벽을 느슨하게 하고, 잠겨 있던(포합된) 성분을 그 자리에서 풀어 국소적으로 깨웁니다. 약이 아픈 곳을 골라 깨어나는 셈입니다. (약이 아픈 곳에서 깨어나는 이유)

층 3 — 세포의 문을 여는 곳: 이온채널

생강·계피·박하·산초 같은 재료의 성분은 세포막의 '문'(이온채널)에 열쇠처럼 꽂혀 신호를 만듭니다. 생강의 매운 성분이 고추의 캡사이신과 같은 자리에서 그 문을 연다는 것까지 밝혀져 있습니다. (한약재의 매운맛은 왜 몸에 작용하는가)

층 4 — 적은 양이 크게 작용하는 곳: 감각 수용체의 증폭

우리 몸의 후각 수용체는 코에만 있지 않습니다. 혈관·장·근육 곳곳에 같은 종류의 수용체(이소성 후각 수용체)가 있고, 감각 수용체는 신호를 수백 배로 증폭합니다. 그래서 한약 성분은 적은 농도로도 작용할 수 있습니다. (한약은 왜 듣는가 — 농도의 역설)

층 5 — 면역을 조율하는 곳: 장 점막

몸에서 면역세포가 가장 많이 모인 곳이 장입니다. 장의 환경을 다스리는 일이 곧 면역의 바탕을 다스리는 일과 이어집니다. (면역력은 장에서 결정됩니다)

층 6 — 적정선의 자극이 회복을 부르는 곳: 호메시스

약한 자극이 몸의 방어·회복 반응을 오히려 깨우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센 약이 늘 좋은 약은 아닙니다. 어느 선을 넘으면 이로움은 멈추고 부담만 올라갑니다. (센 약이 좋은 약일까)

그래서 왜 '여러 층'이 중요한가

오래된 병은 대개 한 축만 무너져 있지 않습니다. 여러 축이 함께 흔들려 있습니다. 그런 상태를 되돌리려면 여러 축을 동시에 조금씩 미는 편이, 한 축을 세게 미는 것보다 나을 때가 있습니다.

이 '다성분·다표적'이라는 성질은 최근 약리학에서도 다루는 주제입니다. 여러 성분이 여러 표적에 동시에 작용하는 방식을 네트워크로 그려 설명하려는 흐름이 그것입니다.

다만, 정직하게 짚을 것

저는 이 '다층작용'을 자랑으로 쓰지 않겠습니다. 바로 이 성질 때문에 한약은 증명하기가 어렵습니다. 무엇이 무엇을 했는지 가려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약점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여러 층에서 작용한다'는 말이 '아무 데나 듣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 어느 층이 먼저 기울었는지를 사람마다 다르게 읽고, 거기에 맞춰 처방을 설계하는 것이 제 일입니다.

확립된 것: 위 각 층의 개별 기전(장내세균의 성분 활성화, 산성 환경의 작용, 이온채널 결합, 감각 수용체 증폭, 장 면역, 호메시스)은 저마다 연구로 뒷받침됩니다 — 자세한 근거는 각 층의 글에 달아 두었습니다. 한약이 다성분·다표적으로 작용한다는 관점도 약리학에서 다뤄집니다.

제 해석인 것: 이 층들을 '다층작용'이라는 하나의 틀로 묶어, "병마다 먼저 기운 축이 다르므로 여러 축을 동시에 조금씩 움직인다"고 읽는 것 — 이것은 제가 임상에서 세운 틀이지, 통째로 증명된 것이 아닙니다.

참고한 연구

  • 한약의 다성분·다표적 작용을 네트워크로 설명하는 최근 리뷰: Network pharmacology: a crucial approach in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research, Chinese Medicine (2025). 원문 보기

(각 층의 세부 근거는 위 본문에 연결한 개별 글에 실었습니다.)


한약은 한 곳을 세게 누르는 약이 아닙니다. 여러 층에서, 동시에, 조금씩 몸의 환경을 움직여 몸이 스스로 수리하게 돕는 약입니다.

한약이 신비해서 듣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여러 층을 따라 듣습니다. 저는 그 층들을 하나씩 알고 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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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미르애한의원 광진점 대표원장 허지영 프로필 사진

허지영 대표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병리학(질병의 기전)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같은 대학 본초학 교실에서 학술연구교수로 약물을 연구했습니다. 질병과 약물을 양쪽에서 연구한 이력이 진료의 바탕입니다 — "이 약이 왜 이 병에 듣는가"를 병리와 약리 양쪽 언어로 설명합니다. 자율신경과 만성·난치질환, 체형·구조의 문제를 현대과학의 언어로 설명하고, 원인에 맞는 치료를 제안합니다. 한의사를 대상으로 처방과 임상 강의를 10년 이상 해 왔으며, 저서 《한의사들이 읽어주는 한의학》 공동 저자입니다. 이 책은 2018년 하반기 세종도서 교양부문에 선정되었습니다(기술과학 분야 15종에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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