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약은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았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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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약은 과학적 근거가 없잖아요."
이 말을 들으면 저는 반박부터 하지 않습니다. 그 말에는 맞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틀린 부분도 있습니다. 오늘은 그 둘을 나눠 보겠습니다.
먼저, 맞는 부분
한약 전체가 현대적 기준으로 검증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수천 가지 약재의 수많은 조합을 하나하나 임상시험으로 확인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처방은 연구가 꽤 쌓여 있고, 어떤 처방은 거의 없습니다. "한약은 다 검증됐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말은 믿지 마십시오. 저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 인정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한의학의 오래된 설명 중에는 지금의 언어로 다시 써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옛말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저는 그 작업을 제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검증되지 않았다'는 말에도 함정이 있습니다
연구가 없는 것과, 연구해서 효과가 없다고 밝혀진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이 둘이 자주 뒤섞입니다. "근거가 없다"는 말이 "효과가 없다는 근거가 있다"로 슬쩍 바뀝니다. 그건 논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실제로는, 약리 수준에서 확인된 것들이 이미 상당히 있습니다.
- 한약 성분이 여러 표적에 동시에 작용한다는 것(다중표적)
- 성분 상당수가 장내세균의 대사를 거쳐야 활성화된다는 것
- 낮은 자극이 몸의 조절력을 오히려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호메시스)
- 감초의 성분이 특정 효소를 억제하고, 염증 경보물질에 직접 작용한다는 것
이런 것들은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약리학에서 다뤄지는 내용입니다. 다만 이 조각들을 하나의 그림으로 잇는 것은 제 임상의 해석입니다. 저는 이 둘을 늘 나눠서 말씀드립니다. (한약은 무엇을 하는가)
검증이 어려운 진짜 이유
한약이 현대적 임상시험 틀에 잘 안 맞는 데에는 구조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한약은 사람마다 다르게 짭니다. 같은 병명에도 사람에 따라 처방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임상시험은 모두에게 똑같은 약을 주는 것을 전제로 설계됩니다. 사람마다 다른 약을 주면 시험 설계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같은 병인데 왜 사람마다 다르게 치료할까)
둘째, 성분이 하나가 아닙니다. 한 첩 안에 수십, 수백 가지 성분이 있고 서로 영향을 줍니다. "이 성분이 이 효과를 냈다"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셋째, 대상이 다릅니다. 한약이 자주 쓰이는 자리는 검사에서 이상이 안 나오는 상태입니다. 수치로 잡히지 않는 것을 결과 지표로 삼기가 어렵습니다.
이건 변명이 아니라 문제의 성격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가 있다고 해서 "그러니 검증 안 해도 된다"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떻게 하는가
저는 근거를 한 덩어리로 다루지 않고 층으로 나눠서 씁니다.
| 층 | 무엇인가 | 제가 쓰는 태도 |
|---|---|---|
| 확립된 것 | 약리·생리에서 확인된 기전, 독성·상호작용 | 그대로 따릅니다. 어길 수 없습니다 |
| 연구가 쌓이는 중 | 임상연구가 있으나 결론이 굳지 않은 것 | 참고하되 단정하지 않습니다 |
| 제 임상의 해석 | 조각들을 이어 만든 제 그림 | 해석이라고 밝히고 말합니다 |
| 옛 문헌의 표현 | 오래된 용어와 설명 | 지금 언어로 다시 씁니다 |
환자분께 설명할 때 저는 이 층을 밝힙니다. "이건 확인된 것입니다", "이건 제 판단입니다"라고 나눠 말합니다. 그 구분을 흐리는 순간 신뢰가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리는 한계
한약이 모든 병에 답이 되지 않습니다. 부품이 크게 망가진 경우, 급한 경우, 수술이나 강한 약이 먼저인 경우가 분명히 있습니다. 저는 그럴 때 검사와 다른 진료를 먼저 권합니다. 그것이 근거를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저는 "낫는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어떤 방향으로, 어떤 근거로, 얼마나 해보고 판단할지를 말씀드립니다. 안 되면 안 된다고 말하고 방향을 바꿉니다.
병원에 먼저 가야 하는 경우
- 갑자기 생긴 심한 통증, 마비, 말이 어눌해지는 증상
- 체중이 뚜렷한 이유 없이 빠지는 경우
- 열이 오래 가고 밤에 식은땀이 나는 경우
- 피가 섞인 가래·대변·소변
- 이미 암·심장·신장 등의 진단을 받고 치료 중인 경우 (한약은 그 치료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과학적 근거가 있느냐"는 질문은 저를 불편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계속 붙들고 있는 질문입니다.
제 답은 이렇습니다. 확인된 것은 확인된 대로,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제 해석은 해석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경계를 흐리지 않겠습니다.
이만큼 말할 수 있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정직한 한의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