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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2026년 7월 10일

약은 온몸을 도는데, 왜 아픈 곳에서만 듣는가

경희미르애한의원 광진점 대표원장 허지영 프로필 사진
의료 감수 허지영 대표원장

"먹는 약이 어떻게 아픈 무릎을 찾아갑니까?"

진료실에서 이 질문을 받으면 저는 잠시 멈춥니다. 좋은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약은 입으로 들어가 위와 장을 지나 피를 타고 온몸을 골고루 돕니다. 무릎에만 가지 않습니다. 손끝에도 가고 머리카락 뿌리에도 갑니다.

그런데 효과는 무릎에서 나타납니다. 왜 그럴까요.

흔한 대답은 "약이 아픈 곳을 찾아간다"입니다. 저는 이 설명을 쓰지 않습니다. 약은 길을 모릅니다. 약은 아무것도 찾지 않습니다.

제 대답은 반대편에 있습니다. 찾아가는 것은 약이 아니라, 달라진 것은 그 자리입니다.


이 글에서 말하려는 것 한 문장

병은 부품이 망가져서가 아니라 환경이 달라져서 생깁니다.
약은 그 달라진 환경에서 다르게 행동합니다.
그래서 약효는 온몸이 아니라 무너진 자리에서 드러납니다.


먼저, 널리 퍼진 오해부터

흔한 생각 제가 이해하는 것
약이 아픈 곳을 찾아간다 약은 온몸에 고르게 퍼집니다. 길을 모릅니다
아픈 곳에 약이 더 많이 쌓인다 쌓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그 자리에서 약의 성질이 바뀝니다
약효는 성분의 세기가 정한다 같은 성분도 환경에 따라 다르게 작용합니다
좋은 약은 온몸을 좋게 한다 좋은 약은 무너진 축을 되돌립니다. 나머지는 건드리지 않습니다

무너진 자리는 무엇이 다른가

몸의 어느 자리가 오래 아프면, 그 자리는 건강한 자리와 환경 자체가 달라집니다. 세포가 망가지기 전에 먼저 환경이 변합니다.

무엇이 달라지는지 하나씩 보겠습니다.

혈관이 헐거워집니다.
염증이 오래 머문 자리는 혈관 벽의 이음새가 느슨해집니다. 평소라면 혈관 밖으로 잘 나가지 못할 물질도 그 자리에서는 스며 나갑니다.

산성으로 기웁니다.
그 자리는 산소가 모자라고 대사 찌꺼기가 쌓입니다. 그래서 주변보다 더 산성이 됩니다. 이것이 뒤에 나올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빠져나가는 길이 막힙니다.
들어온 물질을 치워 내는 흐름(림프·정맥)이 느려집니다. 들어오기는 쉽고 나가기는 어려운 자리가 됩니다.

받는 쪽이 예민해집니다.
신호를 받는 수용체의 숫자와 민감도가 달라집니다. 같은 신호에도 다르게 반응합니다.

   건강한 조직                     무너진 조직
 ─────────────────            ─────────────────
  혈관 이음새 촘촘              혈관 이음새 헐거움
  산-염기 균형 유지             산성으로 기욺
  들어오고 나감이 원활          들어오긴 쉽고 나가긴 어려움
  수용체 반응 안정              수용체 예민 / 둔감
 ─────────────────            ─────────────────
        ↓                             ↓
   약이 지나간다                약이 머물고, 성질이 바뀐다

산성이라는 열쇠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려워 보이지만 원리는 단순합니다.

약 성분의 상당수는 산(酸)의 성질을 띱니다. 이런 물질은 주변이 산성이면 전기적으로 중성에 가까워집니다. 중성에 가까워진 물질은 세포막이라는 기름 장벽을 더 쉽게 통과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됩니다.

  1. 무너진 자리는 주변보다 산성이다
  2. 약 성분은 그 자리에서 세포 안으로 더 잘 들어간다
  3. 세포 안은 상대적으로 덜 산성이다 → 들어간 성분은 다시 전기를 띤다
  4. 전기를 띤 물질은 세포막을 다시 넘지 못한다 → 갇힌다

들어가기는 쉽고 나오기는 어려운 구조입니다. 약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 자리의 환경이 약을 붙잡습니다.

여기에 앞서 말한 헐거워진 혈관과 막힌 배수로가 겹칩니다. 스며들기 쉽고, 갇히기 쉽고, 빠져나가기 어렵습니다. 세 가지가 한 자리에서 만납니다.

그래서 한약의 낮은 농도가 설명됩니다

저는 다른 글에서 한약의 농도의 역설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한약 성분이 혈액에 남는 농도는 현대 약물의 기준으로 보면 놀랄 만큼 낮은데도 몸이 분명히 반응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글의 관점을 얹으면 그 역설이 조금 풀립니다.

혈액 전체의 농도가 낮은 것과, 무너진 자리의 농도가 낮은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피를 뽑아 재는 농도는 온몸의 평균입니다. 평균이 낮아도, 환경이 달라진 자리에서는 성분이 머물고 모입니다.

몸 전체를 고르게 밀어붙이지 않으면서, 필요한 자리에서만 작용하는 것 — 저는 이것이 한약이 오래 복용에도 비교적 부담이 적었던 이유의 하나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여기까지만 말하면 반쪽입니다. 모든 병을 산-염기와 압력의 언어로 번역하려는 유혹을 저는 경계합니다.

무너지는 축은 여러 갈래입니다.

이 축이 먼저 무너지면
물리적 축 장력·응력·압력이 쌓여 조직의 성질이 바뀝니다
화학적 축 산-염기, 효소, 이온의 균형이 흔들립니다
대사 축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일 자체가 무너집니다
면역 축 장 점막의 면역 기준선이 흔들려 전신이 따라 흔들립니다
시간 축 같은 자극도 얼마나 빠르게, 얼마나 오래 쌓였는가로 결과가 갈립니다
신경계 축 자율신경과 통증 회로가 스스로 증폭합니다
순환 축 들어오고 나가는 흐름이 느려집니다
내분비 축 코티솔을 비롯한 조절 호르몬이 소모됩니다

이 축들 사이에 위아래는 없습니다. 병마다 먼저 무너진 축이 다릅니다. 하나가 무너지면 나머지가 연쇄로 흔들릴 뿐입니다.

예를 들어 설사가 오래되어 기운이 빠지고 손발이 차가워진 분에게는 압력의 언어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장 점막의 면역이 먼저 흔들렸고, 흡수가 무너졌고, 그래서 에너지 대사가 주저앉았고, 말초 혈류가 줄었고, 마지막으로 부신이 소모된 것입니다. 이 분에게 필요한 것은 압력을 낮추는 일이 아니라 장의 면역을 안정시키고 흡수를 되살리는 일입니다.

반대로 아랫배의 압력이 올라가 사타구니 인대가 당겨지고 신경이 눌려 스치기만 해도 아파진 분에게는 물리적 축이 주인공입니다.

어느 축이 먼저 무너졌는지 읽는 것 — 저는 그것이 진료라고 생각합니다.

치료가 하는 일

이렇게 보면 치료의 목표도 달라집니다.

부품을 갈아 끼우는 일이 아닙니다. 환경을 되돌리고, 몸이 스스로 반응을 안정시키도록 돕는 일입니다.

  • 굳은 조직은 꺾어서 펴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바뀌도록 풀어야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 흐름이 막힌 자리는 뚫는 것이 아니라, 흘러갈 이유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 예민해진 신경은 눌러 끄는 것이 아니라, 놀랄 일이 없어져야 가라앉습니다

약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을 대신해서 일하는 약이 아니라, 몸이 다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약을 저는 씁니다.

정직하게 남겨 두어야 할 것

여기까지 말씀드린 내용 가운데 어디까지가 확립된 것이고 어디부터가 제 해석인지 밝히는 것이 옳겠습니다.

확립된 것

  • 염증이 오래된 조직에서 혈관 투과성이 높아진다는 것
  • 그런 조직이 주변보다 산성으로 기운다는 것
  • 산성 환경에서 약산성 물질의 세포막 통과가 달라진다는 것
  • 한약 성분 다수가 장내 미생물의 대사를 거쳐 활성화된다는 것

아직 확립되지 않은 것

  • 이 원리들이 사람의 몸에서, 한약의 낮은 농도로, 실제로 얼마나 크게 작동하는지
  • 위 기전들이 각각 어느 만큼씩 기여하는지

대부분의 근거는 시험관과 동물에서 나왔습니다. 사람에게서 이 모두를 직접 확인한 연구는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을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제가 임상에서 관찰한 것을 설명해 주는 틀로 씁니다.

그리고 이 틀로 설명되지 않는 병도 많습니다. 한약으로 도울 수 없는 병은 도울 수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환자분께 드릴 수 있는 최소한의 정직함이라고 생각합니다.


환자분께서 "이 약이 왜 저한테 듣습니까"라고 물으실 때, 저는 성분 이름을 대는 대신 이렇게 말씀드리려 합니다.

약이 선생님의 무릎을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의 무릎이 달라져 있어서, 약이 그곳에서 다르게 행동한 것입니다.

그러니 치료가 끝난 뒤에도 그 자리의 환경을 지키는 일이 남습니다. 약을 끊으면 돌아오는 병이 있다면, 그것은 약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환경이 아직 그대로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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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미르애한의원 광진점 대표원장 허지영 프로필 사진

허지영 대표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병리학(질병의 기전)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같은 대학 본초학 교실에서 학술연구교수로 약물을 연구했습니다. 질병과 약물을 양쪽에서 연구한 이력이 진료의 바탕입니다 — "이 약이 왜 이 병에 듣는가"를 병리와 약리 양쪽 언어로 설명합니다. 자율신경과 만성·난치질환, 체형·구조의 문제를 현대과학의 언어로 설명하고, 원인에 맞는 치료를 제안합니다. 한의사를 대상으로 처방과 임상 강의를 10년 이상 해 왔으며, 저서 《한의사들이 읽어주는 한의학》 공동 저자입니다. 이 책은 2018년 하반기 세종도서 교양부문에 선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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