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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2026년 5월 3일

몸은 하나의 유체입니다 — 압력으로 읽는 통증

경희미르애한의원 광진점 대표원장 허지영 프로필 사진
의료 감수 허지영 대표원장

검사는 정상인데 계속 아프다.

진료실에서 이 말을 듣지 않는 날이 거의 없습니다. 사진에는 아무 이상이 없고, 피 검사도 깨끗한데, 환자분은 분명히 아픕니다. 이럴 때 "신경성입니다"라거나 "스트레스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저는 설명을 포기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럴 때 몸을 보는 틀을 바꿉니다. 몸을 부품들의 조립품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거대한 유체로 놓고 봅니다.

몸의 대부분은 물입니다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이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혈액도 물이고, 조직 사이를 채운 체액도 물이며, 세포 안도 물입니다. 이 물들은 막으로 나뉘어 있지만 완전히 끊겨 있지 않습니다. 압력은 전달되고, 물은 압력이 낮은 쪽으로 흐릅니다.

그렇다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렇게 다시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것 유체로 읽으면
붓고 무겁다 체액이 고여 압력이 높아졌다
뻣뻣하고 안 움직인다 탄성이 떨어져 조직이 굳었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아프다 압력이 밀리며 약한 곳에서 터진다
검사는 정상인데 아프다 구조가 아니라 환경이 달라졌다

압력이 높아진 곳에서 벌어지는 일

한 부위에 압력이 오래 높아져 있으면, 순서대로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압력 상승
   ↓
탄성 저하 (조직이 뻣뻣해짐)
   ↓
세포 변성 (제 기능을 못 하는 세포가 늘어남)
   ↓
염증 반응 (은근한 염증이 식지 않고 남음)
   ↓
주변 화학 환경 변화 (pH가 기울고, 혈관이 헐거워짐)
   ↓
통증 신호가 계속 올라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사슬 어디에도 "뼈가 어긋났다"거나 "디스크가 튀어나왔다"는 항목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영상 검사는 정상으로 나옵니다. 구조는 멀쩡한데, 그 구조가 놓인 환경이 달라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픈 곳이 원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유체는 한 군데를 누르면 다른 데가 부풀어 오릅니다. 몸도 그렇습니다.

실제로 제가 본 경우입니다. 허벅지 앞쪽이 스치기만 해도 아플 만큼 심한 통증을 겪던 분이 계셨습니다. 마약성 진통 패치를 붙이고 계셨습니다.

허벅지를 아무리 살펴도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배를 만져 보니 아랫배의 압력이 비정상적으로 높았고, 사타구니 인대의 한쪽이 팽팽하게 긴장해 있었습니다. 그 긴장이 허벅지로 내려가는 신경과 혈관을 누르고 있었습니다.

그 부위의 긴장을 풀어 드리자, 허벅지 통증이 절반 이하로 줄었습니다. 허벅지에는 손도 대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아픈 곳은 결과가 나타나는 자리이고, 원인은 압력이 시작된 자리입니다. 이 둘은 자주 다릅니다.

보상의 사슬

몸은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견디기 위해 다른 곳을 씁니다. 이것을 보상이라고 합니다.

아랫배의 압력이 높아지면 허리가 그것을 버티려 과하게 긴장합니다. 그러면 이번엔 종아리 뒤쪽이 아파 옵니다. 환자분은 종아리가 아프다고 오시지만, 종아리를 치료해서는 낫지 않습니다. 사슬의 맨 앞을 찾아야 합니다.

앞의 그 환자분도 그랬습니다. 종아리 뒤쪽 통증이 먼저 있었고, 그것이 치료로 풀린 뒤에도 허벅지 통증이 남았습니다. 사슬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습니다.

굳은 조직은 어떻게 풀리는가

압력이 오래 걸려 굳은 조직은, 힘으로 꺾는다고 풀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방어합니다.

여기서 요변성(thixotropy)이라는 성질이 등장합니다. 어떤 물질은 가만히 두면 굳어 있다가, 적절한 자극을 주면 서서히 물러집니다. 케첩이 그렇습니다. 병 속에서는 굳어 있지만 흔들면 흐릅니다.

우리 몸의 결합조직도 이 성질을 지닙니다. 그래서 저는 뼈를 우두둑 꺾는 대신, 조직이 스스로 무르게 풀릴 만한 자극을 줍니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지만,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한약도 같은 자리를 봅니다

약물 성분은 온몸을 돕니다. 그런데 압력이 높고 pH가 기운 자리에서는 혈관이 헐거워져 성분이 더 잘 빠져나오고, 그 자리에 머물며 강하게 작용합니다.

즉 약이 아픈 곳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 달라진 곳이 약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처방을 설계할 때 이렇게 묻습니다. 고인 것을 빼야 하는가, 굳은 것을 무르게 해야 하는가, 과열된 것을 식혀야 하는가. 성분을 고르기 전에, 그 성분이 도착할 자리의 조건을 봅니다.

한의학이 오래 말해 온 것

한의학은 오래전부터 이렇게 말해 왔습니다. 막힌 곳, 고인 곳, 열이 뭉친 곳.

저는 이 말들을 은유로만 읽지 않습니다.

옛 언어 제가 읽는 방식
막혔다 순환과 물질 교환이 끊긴 조직
고였다 체액이 정체되어 압력이 높아진 조직
열이 뭉쳤다 염증이 지속되며 화학 환경이 달라진 조직
기가 통하지 않는다 압력 구배가 무너져 흐름이 서지 않는 상태

옛 사람들이 손끝과 눈으로 읽어낸 것을, 지금 우리는 압력과 탄성과 산-염기의 언어로 다시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한의학을 낮추는 일이 아니라, 그 관찰이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밝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손으로 만져 봅니다

영상 검사는 구조를 보여 줍니다. 뼈가 어디 있고 디스크가 얼마나 나왔는지.

손은 환경을 읽습니다. 굳었는지 물렁한지, 누르면 압력이 어디로 밀리는지, 열이 있는지 오히려 차가운지, 탄성이 남아 있는지.

검사가 정상인데 아프신 분에게 남아 있는 정보는 대부분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픈 곳만이 아니라 배와 허리와 사타구니와 횡격막까지 넓게 만져 봅니다. 압력이 시작된 자리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정리하면

  1. 몸은 하나의 연결된 유체입니다 — 한 곳의 압력은 다른 곳으로 전달됩니다
  2. 압력이 오래 높은 곳은 굳고, 변성되고, 염증이 남습니다 — 구조는 정상인데 아픈 이유입니다
  3. 아픈 곳과 원인인 곳은 자주 다릅니다 — 보상의 사슬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4. 굳은 것은 꺾지 않고 무르게 풉니다 — 요변성의 원리입니다
  5. 약도 환경이 달라진 자리에서 작용합니다 — 성분보다 조건이 먼저입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릴 것

이 틀은 제가 임상과 공부를 통해 세운 관점입니다. 어떤 고리는 연구로 잘 뒷받침되고, 어떤 고리는 아직 가설의 영역에 있습니다. 저는 그 둘을 구분해서 말씀드리려 합니다.

그리고 이 틀로 모든 통증을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골절도 있고, 종양도 있고, 감염도 있습니다. 그런 신호가 보이면 저는 검사를 먼저 권해 드립니다.

다만 검사가 정상인데 아프다는 말을 들으신 분께, "이상 없습니다"가 끝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언어로 읽어야 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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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미르애한의원 광진점 대표원장 허지영 프로필 사진

허지영 대표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병리학(질병의 기전)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같은 대학 본초학 교실에서 학술연구교수로 약물을 연구했습니다. 질병과 약물을 양쪽에서 연구한 이력이 진료의 바탕입니다 — "이 약이 왜 이 병에 듣는가"를 병리와 약리 양쪽 언어로 설명합니다. 자율신경과 만성·난치질환, 체형·구조의 문제를 현대과학의 언어로 설명하고, 원인에 맞는 치료를 제안합니다. 한의사를 대상으로 처방과 임상 강의를 10년 이상 해 왔으며, 저서 《한의사들이 읽어주는 한의학》 공동 저자입니다. 이 책은 2018년 하반기 세종도서 교양부문에 선정되었습니다(기술과학 분야 15종에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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