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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2026년 7월 15일

약이 아픈 곳에서 깨어나는 이유 — 산성이 된 자리에서 벌어지는 일

경희미르애한의원 광진점 대표원장 허지영 프로필 사진
의료 감수 허지영 대표원장

먹은 약은 온몸을 돕니다. 그런데 효과는 무너진 자리에서 나타납니다. 저는 다른 글에서 그 이유를 "약이 똑똑해서가 아니라, 그 자리의 환경이 달라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약은 온몸을 도는데, 왜 아픈 곳에서만 듣는가)

오늘은 그 "환경"이라는 말을 한 겹 더 벗겨 보겠습니다. 아픈 자리는 대개 산성으로 기울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산성이라는 조건 하나가, 약이 하는 일을 두 갈래로 바꿉니다.

먼저, 아픈 자리는 왜 산성이 되는가

염증이 생긴 조직은 산소가 부족해집니다. 세포는 산소가 모자라면 에너지를 만드는 방식을 바꾸고, 그 과정에서 젖산이 쌓입니다. 운동을 심하게 하면 근육이 시큰해지는 그 젖산입니다.

그래서 염증이 오래 머문 자리는 주변이 국소적으로 산성으로 기웁니다. 몸 전체가 산성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딱 그 자리, 문제가 생긴 좁은 구역이 그렇습니다.

이건 잘 확인된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산성이라는 조건이, 지금부터 말씀드릴 두 가지 일을 합니다.

염증으로 산성이 된 조직에서 장벽이 느슨해지고, 잠긴 성분이 활성형으로 풀리는 과정

산성이 하는 첫 번째 일 — 장벽을 느슨하게 합니다

우리 몸의 상피(장, 혈관, 점막의 표면)는 세포들이 타이트정션이라는 이음매로 촘촘히 붙어 장벽을 이룹니다. 정상일 때 이 장벽은 아무거나 통과시키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변이 산성으로 기울면 이 이음매가 느슨해집니다. 장세포를 이용한 실험에서, 산성(pH 6.0) 환경에 둔 세포는 정상(pH 7.4)일 때보다 투과성이 높아졌습니다. 장벽이 헐거워진 것입니다.

이것은 양날의 성질입니다. 한쪽으로는, 필요한 성분이 문제가 생긴 자리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쪽으로는, 장벽이 지나치게 느슨해지면 새어서는 안 될 것까지 새어 나가 오히려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좋다/나쁘다"로 단정하지 않습니다. 자리와 정도의 문제입니다.

산성이 하는 두 번째 일 — 잠긴 약을 그 자리에서 깨웁니다

여기서부터가 제가 가장 흥미롭게 여기는 대목입니다.

성분이 몸에 들어오면, 간과 장은 그것을 그대로 두지 않습니다. 당이나 황산기 같은 꼬리표를 붙여 "포합"이라는 처리를 합니다. 이렇게 꼬리표가 붙은 형태는 대개 비활성입니다 — 몸이 배출하기 좋게 잠가 둔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혈액을 도는 성분의 상당수가 실은 이 잠긴 형태입니다.

그런데 염증이 생긴 산성 자리에서는 이 잠금이 풀립니다.

한 연구는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염증으로 활성화된 면역세포(대식세포)는 젖산을 뿜어 주변을 산성으로 만들고, 그 산성 환경에서 탈포합 효소(β-글루쿠로니다아제)가 작동해, 잠겨 있던 성분(케르세틴 글루쿠로나이드)에서 활성 물질이 그 자리에서 풀려납니다. 그리고 풀려난 그 활성 물질이 바로 그 자리의 염증을 가라앉히는 일을 합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약은 잠긴 채로 온몸을 돌다가, 산성이 된 아픈 자리에 이르러서야 열쇠가 돌아갑니다. 아픈 곳을 골라 깨어나는 셈입니다. 약이 똑똑해서가 아니라, 아픈 자리의 조건(산성)이 열쇠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제가 앞서 말씀드린 이야기와 정확히 이어집니다. 잠긴 성분을 장내 세균이 열어 주는 이야기 (같은 한약인데 왜 사람마다 다르게 들을까), 그리고 표적을 하나의 수용체가 아니라 조직의 산-염기 상태로 본다는 이야기 (한약은 왜 듣는가 — 농도의 역설) — 모두 같은 그림의 다른 조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확히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잠금이 풀린다"는 이야기에는 확실한 부분과 아직 논쟁 중인 부분이 섞여 있습니다. 저는 이 둘을 뭉뚱그리지 않겠습니다.

  • 당(글루쿠론산)으로 잠근 형태가 염증·산성 자리에서 풀린다는 것은 비교적 잘 뒷받침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연구가 그 경우입니다.
  • 황산으로 잠근 형태도 조직에서 풀려 활성형을 공급한다는 연구가 있지만, 혈관 수준에서는 황산 포합체가 잘 풀리지 않는다는 반론도 함께 있습니다. 이쪽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포합된 약이 아픈 곳에서 다 풀린다"고 말하면 과장입니다. 정확히는 "특히 당으로 잠근 형태가, 염증이 산성으로 만든 자리에서 풀리는 것이 확인되었다"입니다. 황산 쪽은 흥미로운 가능성이되 아직 확정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이 뜻하는 것

저는 이 두 가지 — 장벽이 느슨해지는 것과 잠긴 약이 풀리는 것 — 를 한약이 몸에서 하는 일의 한 층으로 봅니다. 약은 한 곳에서 한 가지 일만 하지 않습니다. 여러 층에서 동시에 움직입니다. 산성 환경을 매개로 한 이 국소적 작용은 그중 한 층입니다.

그리고 이 층은 왜 효과와 부작용이 같은 자리에서 나오는지도 설명합니다. (약의 효과와 부작용은 같은 자리에서 나옵니다) 약을 깨우는 것도 그 산성 자리이고, 지나치면 부담을 주는 것도 같은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진료실에서 확인하는 것

기전이 이렇다면, 따라오는 예측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측은 진료실에서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염증이 오래 머물러 조직이 만성적으로 산성으로 기운 분, 장벽이 이미 헐거워져 있는 분 — 이런 분들은 같은 약에도 반응의 결이 다릅니다. 그래서 저는 통증이든 소화든, 그 자리의 염증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장벽 상태가 어떤지를 함께 봅니다. 약을 바꾸기 전에, 약이 깨어날 자리의 조건부터 봅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고 하지 마셔야 할 것

기전이 흥미롭다고 해서 특정 성분을 따로 구해 드시는 일은 하지 마십시오. 성분 하나가 어느 자리에서 얼마나 풀리는지는, 그 사람의 염증 상태와 장의 조건, 함께 쓰는 다른 약재에 따라 전혀 달라집니다. 저는 이 기전을 알기에 오히려 더 조심해서, 양과 기간과 그 사람의 조건을 함께 따져 씁니다. 아는 것과 임의로 쓰는 것은 다릅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이 글에서 어디까지가 확실하고 어디부터가 제 해석인지 구분해 드리겠습니다.

확립된 것: 염증이 생긴 조직이 젖산으로 국소 산성화된다는 것. 산성 환경이 장세포의 장벽 투과성을 높인다는 것(세포 실험). 당(글루쿠론산)으로 포합된 성분이 염증·산성 자리에서 탈포합 효소로 풀려 활성형이 된다는 것(면역세포 실험 + 리뷰).

아직 논쟁 중인 것: 황산으로 포합된 형태의 해리. 조직 공급원이 된다는 견해와, 혈관 수준에서는 잘 풀리지 않는다는 견해가 함께 있습니다.

세포·실험 단계인 것: 위 내용의 상당수는 세포와 조직 모델에서 확인된 것입니다. 사람 몸 안에서 같은 일이 같은 크기로 일어나는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제 해석인 것: "약이 아픈(산성) 자리를 골라 국소적으로 깨어난다"는 것을 한약 다층작용의 한 층으로 읽는 틀 — 이것은 제가 임상에서 세운 관점이지, 증명된 것이 아닙니다.

이 넷은 섞이면 안 됩니다. 섞으면 그럴듯해지지만, 그럴듯한 것과 사실인 것은 다릅니다.

참고한 연구

  • 포합과 탈포합이 플라보노이드 활성의 핵심 단계라는 리뷰(황산 포합체가 혈관 수준에서 잘 풀리지 않는다는 지적 포함): The flavonoid paradox: conjugation and deconjugation as key steps for the biological activity of flavonoids, Journal of the Science of Food and Agriculture (2012). 원문 보기
  • 염증으로 산성이 된 자리에서 탈포합 효소가 작동해 활성 아글리콘이 풀려나는 과정: Mitochondrial Dysfunction Leads to Deconjugation of Quercetin Glucuronides in Inflammatory Macrophages, PLoS One (2013). 원문 보기
  • 산성 pH가 장 상피 장벽의 투과성을 높인다는 세포 실험: Effect of pH and lipopolysaccharide on tight junction regulators and inflammatory markers in intestinal cells, JDS Communications (2023). 원문 보기

먹은 약이 온몸을 돌다가 하필 아픈 곳에서 풀리는 것은 신비가 아닙니다. 그 자리가 산성이라는 조건 때문입니다. 장벽이 느슨해져 접근이 달라지고, 잠겨 있던 성분이 그 자리에서 열립니다.

한약이 신비해서 듣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조건을 따라 듣습니다. 저는 그 조건을 알고 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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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미르애한의원 광진점 대표원장 허지영 프로필 사진

허지영 대표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병리학(질병의 기전)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같은 대학 본초학 교실에서 학술연구교수로 약물을 연구했습니다. 질병과 약물을 양쪽에서 연구한 이력이 진료의 바탕입니다 — "이 약이 왜 이 병에 듣는가"를 병리와 약리 양쪽 언어로 설명합니다. 자율신경과 만성·난치질환, 체형·구조의 문제를 현대과학의 언어로 설명하고, 원인에 맞는 치료를 제안합니다. 한의사를 대상으로 처방과 임상 강의를 10년 이상 해 왔으며, 저서 《한의사들이 읽어주는 한의학》 공동 저자입니다. 이 책은 2018년 하반기 세종도서 교양부문에 선정되었습니다(기술과학 분야 15종에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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